멋진 탕자


♣ 주일설교 2008-09-28 ♣
\"멋진 탕자\"


눅15:11-24 / 권 다니엘 목사

   (본문)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도 아닌데 자기의 분깃 즉 유산을 받아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람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러한 탕자를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도저히 받아 들이기가 힘들고, 받아 들이지 않아도 누구 한사람 시비걸 사람도 없지만 그 탕자를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 그 누구도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을 갖고 계신 아버지는 바로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를 무조건인 사랑으로 받아들인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탕자를 한 번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행한 일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아버지의 픔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제 그는 탕자가 아닙니다. 품군이 아닙니다. 종이 아닙니다. 그는 당당한 아들로서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렇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을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살펴 볼 때 \'이 탕자는 참 멋진 탕자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탕자가 잘 한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있는 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궁핍해졌습니다. 남에게 붙어 살면서 돼지치는 일을 합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나 주는 자가 없습니다. 이런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했을찌라도 이런 상황을 냉정히 바라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인정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자기가 당면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자기는 지금 여기서 굶어 죽게 될 것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17절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렇게 탕자가 정확하게 현재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은 살 수 있는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인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품안을 발견하게 되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가 낙심하여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물고기잡는 어부로 삽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셨는데, 이제 그는 물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물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지금 베드로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왜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질문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바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 3년간을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도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누구 보다도 에수님을 사랑했던 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베드로였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러 나오시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무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둘렀던 의협심이 강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계집종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자기 자신을 보고 심한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끼고, 제자의 사명을 다 집어 던져 버리고 옛날의 어부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고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베드로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지금 너의 모습을 정확하게 들여다 보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이곳에서 어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물고기를 잡는 어부 일은 이미 3년전에 다 버렸고, 지금까지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았지 않느냐, 왜 여기 있느냐?\'는 것입니다. \'빨리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로 복귀하라\'는 것입니다.

   탕자도, 쥐엄열매도 못 얻어 먹는 그 자리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며, 자기의 현재의 형편이 어떠한 가를 정확히 깨닫고 나니 아버지의 품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오늘 내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환경이, 여건이 어떠한 가를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숨기거나 위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자기의 모든 증세와 안 좋은 것을 시시콜콜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해야만 그 환자는 효과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고통스럽니까? 뭐가 잘 안됩니까? 속상합니까?  힘드십니까? 덮지 마십시오. 괜찮은 것처럼 위장하지 마십시오. 숨기지 마십시오. 냉정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내 처지와 형편을 파악합시다.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합시다. 이것만이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들어서게 만듭니다.

둘째, 아버지의 집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17절을 볼까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과거와 달리 아버지의 집이 자기에게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정확하게 바라봅니다. \'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귀찮은 곳이 아니구나. 나를 못살게 구는 아버지의 간섭이 있는 곳이 아니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곳이 아니구나. 나를 속박하는 곳이 아니구나.\'
   그는 과거의 아버지의 집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집은 풍성한 곳이구나, 아버지의 품안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구나, 아버지의 집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구나.\'
   그는 이제야 정학하게 아버지의 집이 어떠한 곳인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이 어떠한 곳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안은 자유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는 원수들이 손댈 수 없는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속박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를 나를 묶고 있는 것을 풀어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라 본다면 과거가 어떠했든지 놀라운 회복 앞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정말로 용기있고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20절을 읽읍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먼저 그는 아버지께 용서를 구할 것을 결심합니다. 용서를 구할 염치가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할 것을 결심하는 것은 아버지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와 열망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자존심을 완전히 버릴 것을 결심합니다. 나는 종의 하나로 봐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이 있는데, 그들이 보고 있는데 자기를 종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것임이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말할 것을 다짐합니다.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 놓겠다는 것이지요.

   이제 드디어 아들은 아버지에게도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일어섰다가 주저 앉아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을 내딛고 계속 갑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행동을 취하는 것보다 그 어느 것보다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행동을 취했기에 그는 아버지의 품안에 안길 수가 있었고 아버지의 집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권리가 회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간 아들은 이제 더 이상 탕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잘먹고 잘쓰고 잘 살아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탕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탕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하나님의 품안에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회복되고 풍성함을 맛보고 되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돌아가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이 탕자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찌라도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야지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한다할찌라도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행동이 없다는 그는 탕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내 경험으로, 내 힘으로, 세상적은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다면 그도 여전히 탕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갑시다. 그 분의 품안에서 거합니다. 아니 그 분 안에서 반드시 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4은 반드시 하나님안에 거해야 할 확실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나님의 품안에 거함으로 열매를 맺고 진정한 풍성함을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위의 그림은 러시아의 상뜨 페테스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거지 차림새를 하고 있는 아들을 감싸안은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 찡한 그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보면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양손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 한쪽은 거칠고 투박한 남자의 손, 반대쪽은 가늘고 여린 어머니의 손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 중 하나인 \'성별\'이 없으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든든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응원하시면서도 묵묵히 바라보시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시기도 하지만, 어머니처럼 우리의 아픔에 직접 눈물을 흘리시며 가슴에 우릴 꼭 품으시기도 합니다. 이 그림 앞에는 늘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이 한참 머물러서서 이 그림을 감격스럽게 감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