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 없는사랑

♣ 주일설교 2008-09-21 ♣
\"알 수 없는 사랑\"


눅 15:11-24 / 권 다니엘목사

    (본문)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둘째 아들이 탕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탕자는 이미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봅시다.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올 분깃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요구는 신명기 21:17의 말씀에 의거해 요구한 것 같습니다. 신명기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서 집안일을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을 받고 사는 것이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말리셨을 것입니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분깃을 다 받아가지고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자기의 몫을 받았으면 몰라도, 아버지가 어연히 건강하게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분깃을 받았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아버지와 인연을 완전히 끊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은 자기가 가지고 나간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13절을 보면,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돈을 자기의 멋대로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과 염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정말로 괘씸한 아들입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아버지는 이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탕자의 아버지를 보면 좀 이상한 아버지 같아요. 집을 나간 아들이 걱정이 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혹시나 아들이 돌아올까봐 매일 동네입구에 나가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이 녀석 고생 좀 해봐야지 ...  아버지의 품이, 집이 얼마나 좋은 지 좀 깨달아야 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고 정신 좀 차려야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탕자의 아버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20절을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랫동안 동네 어귀에 나와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무작정 기다렸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아들을 측은 여기고 불쌍하게 여깁니다. 20절에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라는 말이 나오지요. 아버지는 아버지 품을 떠난 아들의 앞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을 생각할 때 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는 순간에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습니다. 그것봐라 잘 됐다 하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습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환영의 표시입니다. 왜 왔느냐가 아닙니다. 잘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몸에서 옷에서 얼마나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좋은 것을 줍니다. 22절을 봅시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국빈처럼 대우하는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요셉을 대우한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창 41:41-42을 보면,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둘째 아들에게 입힙니다. 여기서 \'제일 좋은 옷\'이란 잔치나 연회 때 입는 가장 아름다운 의복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작은 아들에게 이 옷을 입힌 것은 그를 잔치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가락지를 끼웁니다. 가락지는 부와 위엄을 의미하는 표시로 당시에 가락지를 끼워 준다는 것은 총애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주는 아버지의 행동은 이제 그가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의 지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신을 신기는 것은그가 이제는 종의 신분이 아니라 자유로운 아들로 간주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 옷, 가락지, 신 - 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 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풉니다.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 \'톤\'이 붙어 있어서 그 송아지가 바로 준비해 둔 송아지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아 송아지를 카웠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할 뿐만 아니라 그 때에 누릴 기쁨에 대비하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게십니다.

   우리는 탕자인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바로 이것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단순한 탕자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알 수도 없지만 그 깊고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둘째 아들 즉 탕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불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어떤 이유든지 간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여러 가지 어려운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직도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탕자입니다

   탕자에는 급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의 품안에 있지 않으면 다 탕자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사랑안으로 돌아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시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