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루 만지심

♣ 주일설교 2006-08-13 ♣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 왕상 19:1-8 / 권다니엘 목사 /

  (본문)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언젠가 한 여성도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분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중학교 다니는 큰 아들이 하도 속상하게 해서 야단을 쳤더니, 그 아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면서 엄마를 노려보면서 두손으로 주먹를 지고 부르르 떨더라는 것입니다. 곧 엄마를 때릴 듯한 기세로 말입니다. 엄마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내 아들이 설마 그럴 수 있을까 하면서 자녀에 대한 절망감을 저에게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는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비단 자녀들의 문제뿐이겠습니까? 부부간의 문제, 고부간의 갈등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사업이 무너지고 가게가 문을 닿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고 패기 있는 형제들이 부도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심한 절망감속에 주저앉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의 사업실패, 남편의 실직 때문에 충격을 받아 병원의 치료를 받고 있는 자매님들도 있습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찾아오는 두려움과 절망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도 적지가 않습니다. 불치병, 난치병 때문에 한숨쉬며 절망 속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절망감은 어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은 안 오르죠, 입시는 얼마 안남았죠, 자기에 대한 부모님들의 기대감은 크죠, 극심한 절망감속에서 허덕이는 우리들의 자녀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에게만 절망감이 찾아옵니까? 목회자들에게도 절망감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자신의 무능력, 내면세계의 질서가 안잡힌 자신의 모습,  영적인 고갈 때문에 심한 회의와 절망감이 엄습해올 때가 있습니다. 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다가오는 스트레스, 인간관계 그외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절망감속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는 바울의 탄식에 저 역시 백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목회자들에게도 절망감은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절망감은 믿음의 조상 다윗에게도, 사도 베드로에게도, 사도 바을에게도 찾아 왔던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에게까지도 이 절망감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민하고 슬퍼하시면서 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절망감의 원인이 인간들의 것과는 달랐지만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도 일시적이나마 절망감은 찾아 왔던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그 때의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어떠했습니까? 오랜 세월동안 길르앗 광야와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고 또 받았던 엘리야!  그는 갈멜산에 하나님의 불을 내리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즉은 자를 소생시켰고,  3년 6개월동안의 가뭄을 종식시킨자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홀로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를 무찌른 담대한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갈멜산의 대승리를 거둔 후에 자기 목숨 하나를 위해서 구차하게 도주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사역과 백성들의 기대를 내던지고 광야에서 죽기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들,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게 한 선지자였지만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기에 절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절망의 늪 속에서 몸부림칠 힘조차 없이 누워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은 오늘 절망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당연히 찾아오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절망의 쇠사슬을 벗겨 버리신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고 엘리야 처럼 그 어루만지심을 체험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은 무조건적입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내 조상보다 나은 것이 없고, 이제 할만큼 주의 일도 했으니 나를 죽여달라는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은 한마디의 책망과 질책도 없이 다가 오셨습니다.

  \"까마귀를 통해 오랫동안 내가 너를 먹이지 않았느냐, 사르밧 과부의 가루통과 기름통을 마르지 않게한 이적을 네 손을 통해 일으킨 자가 내가 아니냐, 네 기도를 듣고 죽은 자를 살린 자가 과연 누구냐, 바로 얼마 전에 너의 기도를 통해 불로 응답하고 바알 선지자를 처단하고 가뭄을 종식시킨 자가 바로 내가 아니냐, 내가 너를 통해 이적을 일으켰고 너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악한 한 이방여인 이세벨 때문에 절망해..., 죽여달라고... \"
   한마디 야단을 치실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마디의 책망도 없이 단지 사랑의 손길로 기진하여 누워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집니다. 천사를 통하여 어루만지시지만, 실은 하나님 자신이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루만지다\'는 말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주님의 어루만지심\', \'성령님의 어루만지심\', 이 말만 들어도, 금새 새 힘이 쏟는 것 같고, 주님의 포근한 품안에 안겨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어루만지다\' 라는 말은 특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혼자서 배를 타고 항해 길을 떠납니다. 한참 배를 타고 나가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애를 써도 배를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 왔습니다. 키를 놓고 주저 앉아 울고 있는 그 어린아이에게 음성이 들립니다. \"얘야, 내가 붙들어 줄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서 키를 다시 잡아라\"
  이 아이는 그 말씀에 힘을 얻고 일어나서 다시 키를 잡습니다. 그 아이의 양 어깨를 인자하신 모습의 주님이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어느 그림의 장면을 제가 상상해서 설명해 본 것입니다.
\"얘야 내가 붙들어 줄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 키를 다시 잡아라\" 바로 이것이 \"어루만지심\" 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절망가운데 있습니까?  어떤 절망이라도 좋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은 아주 자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손길은 섬세하고 부드럽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로뎀나무아래서 단순히 낙심하고 한숨쉬면서 앉아 것이 아닙니다. 죽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 잡니다. 그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지쳐 있었을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누워자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4절을 볼까요.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지금 먹지 아니하고 자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쑴하십니까?  일으나 먹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에게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깨우쳐 줄 상황이 아닙니다. 과거에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생각 나도록 해 주어야 할 상황도 아닙니다.
  지금 굶으면서 죽음을 향한 잠을 자고 있는 그에게 막상 필요한 것은 물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큰 손으로 엘리야를 위해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하시는 섬세한 손길을 베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의 특징입니다.
  먹고 마신 뒤 또 쓰러져 버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또 한 번 먹을 것을 주시면서 자상하게 어루만지십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신 뒤.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걸어서 호렙산에 이릅니다.
8절을 봅시다.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무엇에 의지하여 40일 밤낮을 걸을 수 있었습니까? 믿음의 힘이었습니까?  말씀의 힘이었습니까?
바로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상하게 베플어 주신 구운 떡과 물이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다시 한 번 엘리야의 사명을 일깨워주시고, 세미한 소리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토록 해서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다시 한 번 강하게 확인하도록 만드신 것은 언제였습니까?  바로 떡과 물을 주신 후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절망해 있는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 상황을 주의 깊게 급어 살피십니다. 우리가 절망해 있는 그 상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절망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절망가운데도 우리를 향한 자상하고 섬세한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쩨,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은 집요합니다.

   로뎀 나무아래서 죽기를 구하며 깊은 절망의 늪에 드러 누워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다가가셔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고 어루만지십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떡과 물을 먹고 마신 뒤 다시 누워 버리고 맙니다. 엘리야의 절망이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누워버린 엘리야, 도저히 일어 날 것 같지 않은 엘리야를 하나님은 포기해 버리지 않습니다. 또 다시 엘리야를 어루만지십니다.

  7절은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드디어 엘리야는 하나님의 집요하신 어루만지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기진맥진하여 이제는 죽겠다고 드러누운 엘리야가 일어나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이 아니라 무려 사십일 밤낮을 걸어가게 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호렙산에 이릅니다. 그는 거기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집요하신 하나님, 집요하게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엘리야로 하여금 절망에서 일어나게 만드시고야마는 집요하신 하나님,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절망의 늪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은 더욱 더 집요합니다. 무서우리 만큼 집요할 것입니다. 지긋지긋 할 만큼 집요할 것입니다. 기필코 여러분들을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무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너무나 우리에게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