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께 입맞추라

♣ 주일설교 2005-05-15 ♣
\"성령님께 입맞추라\"


 / 요 14:14-16, 26 16:7-8 / 권다니엘 목사 /

  요즈음 한국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는 입맞추는 것은 외국 영화를 보아야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부부끼리도 과거에는 입맞추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입을 맞추면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하기도 힘든 일이 입맞추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한국 영화나 외국 영화를 봐도 애정의 표현으로 남녀가 너무나 쉽게 입맞추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으숙한 골목이 아니라, 남이 지나다니는 도로에서, 전철 안에서 그렇게 힘들지 않게 입맞추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입맞춤이 애정과 존경을 표시할 때 행해진 인사관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입맞춘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서 입맞추는 것이 인사관습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정의 표시로, 사랑한다는 표시로 부부간에 입맞춤을 하고, 부모와 자식간에 입맞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존경의 표시로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부분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당연히 입맞춤의 표시가 우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무거웠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고통을 겪는 것도 큰 부담이었지만 제자들을,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악한 세상에 두고 혼자만 떠나야 한다는 것이 더욱 더 주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셔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는 데 어떻게 고와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바로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이 너희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질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엄마의 병상에서 엄마, 죽지마 하고 울고 있습니다. 그 때는 그 부인은 자기 남편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여보, 이 애들을 잘 키우세요.\'
  물론 아빠가 애들을 잘 키워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어찌 그 부인의 마음이 안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남편한테 그 말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이제 악한 세상에 제자들만 두고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누구한테 이 제자들을 맡겨야 할 것인가?  맡길 분이 있다 하더라도 안심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제자들을 부탁할 분은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성령님을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성령님이라면 나는 안심을 해\', \'성령님이라면 너희들을 나 이상으로 돌보실 거야.\' \'아니야 내가 너희와 계속 있는 것 보다 성령님이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유익해.\'
  성령님이 제자들에 오실 것을 생각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제자들만 두고 가는 안타까움과 무거움이 싹 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7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기서 주님은 보내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표현을 하셨는데,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부름을 받은 자\'로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를 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은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오늘이 바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한 15년 전쯤 되는 것 같습니다. 베니힌 목사님의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는 책이 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교회 이 책을 읽지 말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너무나 신비적이고 이단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맡은 구역의 어느 집사가, 저에게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의 말에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 저도 오래 전부터 그 책의 내용대로 성령님과 대화도 나누고 교제하고 있어요.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집사님도 이단이라는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집사님은 성경을 바로 알았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성령님 오늘 우리 속에도 계시고 우리 곁에도 계십니다. 그분에 우리 곁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 곁에 계실 수 밖에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간절한 부탁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상담자입니다. 우리의 조력자입니다. 우리의 위로자입니다.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귀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와 영혼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 곁에 계시는 데도 우리는 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인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듣지 못합니다. 아니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려고 하는 데도, 우리는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아니 싫다고 고개를 흔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인도하려고 해도 우리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내 고집대로,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오셨는데도, 우리는 그 분에게 사랑의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간단한 인사조차 하지를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돕기 위해 기다리고 게시는 데도, \'성령님 어떨게 해야 할까요?\' \'도와 주세요,\' 이런 말 한마디 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와 가장 밀접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게 우리는 이제 입을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님, 나를 위해서 오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입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환영합니다.\' 영접함으로 입을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시 2: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입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성령님께 입맞추지 않으면 망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환영과 존경의 마음으로 성령님께 입맞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자꾸만 만나기를 원합니다. 어제 만났는데도 오늘 또 만나기를 원합니다. 몇 시간 전에 해어졌는데도 도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성령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첫째, 성령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시 17:15의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말씀을 표준새번역에는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떳떳하게 주의 얼굴을 뵈오렵니다. 깨어나서 주의 모습 뵈올 때에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배옵는 것은 나의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교제하는 사람은 서로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사진을 갖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만납니다. 그래도 또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몇 미터 앞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십시오. 그 다음은 고개를 숙이고 당신 앞에 있은 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의 사물과 당신의 손 사이에 있는 공간을 바라보십시오. 사물이 아닌 어떤 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인격이신 성령님이 임재해 계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십시오.
  육신의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로 그 공간에 영이신 성령님이 임재해 계신 것을 바라보십시오. 곧 성령님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러 보십시오.
 \"성령님, 사랑하는 성령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계시지도 않는 성령님을 상상 속에 만들어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행 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 눈 앞에 항상 성령님의 인격적인 얼굴이 실제로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얼굴은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형체가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격이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의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한 기도시간 뿐 아니라 24시간 항상 성령님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앞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둘째, 성령님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고 싶은 말이 왜 그리 많습니까? 매일 만나도 말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지지요.
  대화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이든지, 상대방을 싫어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상대방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과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성령님과 대화하는 자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대화를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성령님 안녕하세요?  지난 밤에 잘 자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선한 아침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성령님, 이 음식이 참으로 맛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이 꼿이 너무나 아름답군요.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령님, 우리 초대교회 참 아름답지요? 감사합니다.\"
  \"존귀하신 성령님, 이렇게 성령님과 함께 조깅하게 되어 참 기쁘답니다.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이렇게 하다보면 중간 중간에 성령님의 대답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셋째, 성령님을 모시고 다니십시오.

   시 16:8 에는 \'하나님을 모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성령님, 제가 출근합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자 이 차에 먼저 타십시오.\'
  \'성령님 거래처에 갑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갑니다.\'
  \'성령님, 장보러 가시죠.\'
  \'성령님 이제 퇴근합니다. 집에 가시죠. 오늘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청하지 않는다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렇게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 마음으로 사모하고, 말로 요청하면 성령님께서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죄짓는 것을 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4.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구하십시오.
    앰블런스는 위급한 환자를 위해서 급히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앰블런스 일이기 때문입니다.
위급한 상황속에서 119로 전화를 하면 구조대가 지체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사명이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우리가 그분께 도움을 너무 요청하지를 않습니다.

    롬 8:26은 성령님의 도우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서의 \'우리의 연약함\' 이란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전인격체, 삶의 전영역에서의 도우심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은 우리의 영혼만 도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돕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평강을 주님으로 근심과 염려를 사라지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기만 한다면, 성령님은 너무나 기쁘게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오순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님만 간구하지 마십시오. 각 나라 방언으로 듣게 된, 그러한 신비한 성령님의 은사만 구하지 마십시오.
   강림하신 성령님, 임재하신 성령님, 우리와 함께 하십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고, 성령님과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의 모든 삶이 풍요로워지는 성령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