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룻기강해(2)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2004. 2. 11 / 주일설교 / 룻 1:6-18  /  권다니엘 목사 /
인간의 일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단 인간의 일생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선택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출근하지?\" 입을 옷을 선택해야 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점심식사는 무엇을 하지?\" 먹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주부들은 \"저녁 반찬은 무엇을 준비하지?\" 시장에 가서 고민하면서 선택합니다. 퇴근 때가 되면 \"퇴근후에는 무엇을 할까?\"등 우리의 하루는 온통 선택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작게는 이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을 선택하게 되지만 크게는 장래와 인생의 진로를 결정짓는 선택들도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다든지, 평생 함께 살 배우자를 선택한다든지, 신앙생활을 할 교회를 선택하는 것들입니다.
   선택을 잘못했다는 깨달았을 때, 바로 다시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그러한 선택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올바른 선택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선택을 달리한, 이것때문에 운명을 달리해야 하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한 여인은 \'오르바\'요, 다른 여인은 \'룻\'입니다. 이 두 여인들은, 사사시대에 흉년이 들어, 이 흉년을 면하기 위해서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온 한 유대가정의 며느리로 선택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의 남편들은 젊은 나이에 모압땅에서 죽고 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유다 땅에도 곡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듣고 모압땅을 떠나 유다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에게로 돌아가지만 작은 며느리인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선택을 달리한 두여인-오르바와 룻을 살펴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다른 길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6, 7절을 보세요  [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즉 유다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땅으로 가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출발 당시 두 사람의 처지와 환경도 같았습니다. 
둘다 모압 출신 이방인이요,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요,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의 처지이었습니다. 전혀 두사람 사이의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도 차이가 나지를 않습니다. 
흔히들 룻이 시어머니를 더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1:9절에 시어머니가 이별을 선포했을 때 두 사람은 똑같이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이 울음은 시어머니와의 이별에 대한 예의로서의 가장된 눈물이 아니라 시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다는 표시의 눈물이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처음 신앙의 자세도 같았습니다. 
10절을 보면 그들은 울면서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으로 돌아 가겠다는 절규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겠다는 강한 신앙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출발에 있어서는 두 사람에게 차이가 없었슴을 입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가운 사실은 결과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이 달랐습니다.
오르바는 중도에 포기하고 제길로 갔지만 룻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귀중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14절에 보면 오르바와 룻이 대비됩니다. 대성통곡까지는 같이 했습니다. 그러나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었고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다고 말합니다.
  \"입맞추었다\"라는 말은 \"아쉽지만, 정말로 헤어지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이별한다.\"는 뜻입니다.  시어머니와 이별한다는 말은 자기 고향 모압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모압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방백성과 그들이 믿고 있는 이방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방백성과 이방신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이 없고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과거 불신앙의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룻을 보십시요.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다\"라는 말은 \"굳게 결합하다\",\"붙들고 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교로 결합된 것처럼 단단하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시어머니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룻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붙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고 참신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기어코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출발은 같았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선택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오르바는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잘못했을까요?  왜 그녀의 결단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까?

오늘 본문을 종합해보면 다음 세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그녀는 선천적 욕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란 말에 애틋한 그리움과 귀소본능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이 돌아가서 그 품에 안기고 싶은 대상이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어머니 품과 같은 내고향, 어머니가 살고 있는 어머니의 집은 모든 사람을 끌어 당기는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장소입니다. 더군다나 패가망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에는 친정 어머니의 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이 선천적 욕구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품, 하나님의 품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빠들 가운데는 아내와 자녀들을 교회까지 차로 데려다 주는 아빠들이 있습니다. 교회가지 말라고 핍박하는 아빠들에 비하면 고마운 아빠들이지요. 식구들을 교회앞에 내려준 후 아빠들을 차에서 예배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든지 아니면 그 시간동안 싸우나를 즐기기도 합니다.
   어느 주일 날 식구들을 교회까지 태워다 준 후, 교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아빠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저를 보자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쫓아가서 아빠를 븥잡았습니다. 겸연쩍어 하는 아빠와 악수를 한 후, 제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기왕 교회까지 오셨는데 예배를 드리시고 가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분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불교를 믿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그분이 예수믿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바로 선천적 욕구였던 것입니다. 

2. 그녀는 육신적 욕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으라고 호소합니다. 
젊은 과부에게 \'남편\'이란 말이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요?  당시 과부의 처지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기 쉬운 처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닌다.
   이런 처지에 있는 과부로서, 그것도 젊은 과부로서 결혼하여 남편의 품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적 욕망도 채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시어머니의 호소에  바른 결단을 위한 안목이 흐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3. 그녀는 신앙적인 함정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3절 중반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며느리들이 따르고 좇고 있는 시어머니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장본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지주로 믿고 따르는 시어머니가 다른 사람도 아닌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으로 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차곡 차곡 쌓여진 시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이 한순간에 무너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받은 나를 너희가 어떻게 따를 수 있느냐 하는 시어머니의 간곡한 한마디는 그들의 마음에 엄청난 갈등을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오르바는 이러한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함정입니다. 신앙적인 함정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것때문에 실족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일까?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드디어는 하나님을 붙잡는 선택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적인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믿는 사람들때문에 실족했거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을 향한 크리스챤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그들은 선택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도하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사실은 전도를 시도해 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오르바의 결단이 신앙적인 함정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맙니다. 그녀는 드디어 시어머니와 이별의 키스를 하게되는 우매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14절에서 두 사람은 또한번 소리 높여 대성통곡을 합니다. 같은 눈물처럼 보이지만 이제 그 눈물들은 엄연한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한사람의 눈물은 이별을 아쉬워하는 눈물이었지만 한사람의 눈물은 기필코 놓칠 수 없다는 결의에 찬 눈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 선택하면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그러한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아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너무나 자주 보게 됩니다.  아니 다른 사람의 생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 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른 것을 선택하는 행동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른 선택을 못하도록, 아니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의 계략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쉽게 무너 뜨릴 수 있는 욕망은 어떤 것들입니까?  선천적인 본능들입니까? 아니면 물질의 욕심입니까? 강한 명예심임니까? 아니면 이성한 대한 욕망입니까? 그저 고생안하고 평안히 살고 싶은 마음임니까?  사탄은 교묘합니다. 사탄은 정말로 집요합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여러분의 약점을 파고들 수도 있습니다. 마치 나오미가 두 며느리의 연악한 부분을 파고 든 것처럼 말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미국으로 이민간 지 10여년쯤 된 교포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바닷가로 놀러가자\"는 것이었고, 부인은 \"그래도 명색이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주일날 교회 안가고 놀러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주장도 일리가 있고, 부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민생활이란 것이 고달프고 힘들고 피곤한 생활의 연속이 아닙니까? 미국사람들의 생활자체가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벌고 번 돈으로 생을 즐기고 다시 쓴 돈을 갚기 위해 일하는 생활을 반복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저마다 앞다투어 야외로, 바닷가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사람들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들의 삶에서도 보편화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부인은 한주간의 일속에서 너무 지친 남편이 모처럼 꺼낸 말이고 자신도 피로를 씻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태평양, 우거진 나무 숲....., 그늘 아래 앉아 밥을 짓고 고기를 굽고해서 함께 온 친구들 부부와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으례 뒤따르게 마련인 술을 주거니 받거니 마시고 떠드는 가운데 해가 질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야겠기에 짐을 다 쌌습니다. 친구들이, 걱정이 되어서 \"너 운전할 수 있겠니\"라고 하자 집사인, 그 남편은 \"야 걱정하지마 이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안 돼.\"하면서 운전석에 앉았습니다.
    바닷가를 떠난 지 채 30분도 안 되어서 앞에 오는 콘테이너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부인은 현장에서 죽고 남편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남긴 두 마디는 \"주일 날 교회에 갔더라면...\"  \"술이 원수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을 선택했더라면,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것을 선택했더라면

    선택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중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선택인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이 두가지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이별의 입맞춤을 하고 자기의 길로 돌아간 오르바를 우리는 더 이상 성경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른 것을 선택한 룻, 가장 가치있는 것을 끝까지 붙좇은 룻, 그녀는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룻이 되든지 아니면 오르바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무쪼록 성령의 도움으로 룻처럼 현명한 선택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