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아는 은혜(눅5:27-32)
은혜란 무엇인가? 그 은혜를 인하여/‘도토리 키재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내가 크다, 네가 크다 할 때 쓰는 말이죠. 조금 크면 어떻고 조금 더 작으면 또 어떻습니까? 크다 작다 바득거리고 살아 봐야 결국 별 차이 없습니다. 또한 63빌딩 전망대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키 큰 사람이나, 키 작은 사람이나 차이가 없이 모두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고 크기가 다른 버스나 택시도 똑같이 성냥갑 같이 작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선하고 악한가 바득바득 살아 봐도 너무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 비쳐 볼 때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난 사람도 없고 더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너나 나나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탓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잘 했느니 못했느니 손가락질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작은 마을이다 보니까 마을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목사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 하나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러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목사님 앞으로 몰려왔고, 갑론을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 \"아니다! 용서해서는 안 된다.\" 한참 이런 저런 논의를 하고 있는데 한 젊은 청년이 뒤에서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외침은 이러니 저러니 논의를 하던 분위기를 일순간에 잠재우고 말았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그 말에 목사님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시다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청년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보게 만일 하나님께서 자네 말대로 법대로만 하셨으면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갔을 것이네!\" 하나님께서 법대로 하셨으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법대로만 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욕을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5:22) 이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살아가면서 화 한번 안 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욕 한번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법대로 하셨으면 벌써 수십 번 수백 번 심판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갔을 우리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법대로만 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죄 값을 대신 치루게 하셨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사실 인생의 삶은 법속에서 살아갑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말을 합니다만 법 없이 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법이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법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법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법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큰 차를 몰면 품위 유지고, 다른 사람이 큰 차를 타면 과소비라고 몰아 부칩니다. 이런 마음은 결국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인색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한 마음가짐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탐욕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삶에 대해 본이 보이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데도 제자들은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분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도의 생활에서 기쁨과 감사를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빌립보서에도 보면 분쟁하고 다투는 여인들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향해 열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웬 말입니까? 주님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때문에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찬양대원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 서로 다른 음색을 가지고 있지만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하나로 모아질 때 멋진 화음을 이루며 감동적인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대원들 중 \"오늘 내가 컨디션이 좋은데 한 번 튀어볼까?\" 라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불협화음이 되고 맙니다. 나 혼자 잘 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에게나, 다른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근심거리가 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주님도 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백성다운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다른 성도님들에게 기쁨이 되고 면류관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상처와 근심거리가 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말씀만이 아니고, 옳은 말씀만도 아니고, 아름다운 말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말씀만도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살아있는 말씀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내 마음이 주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내 뜻이 주의 뜻에 의해 인도되어 질 때 거기 진정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가 있다.\"
예수님은 바로 나를 위해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내가 가야 했던 그 형벌의 길을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가신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법입니까?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진정 법대로 하자면, 죽어야 할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법을 외치고 있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예배와 감사와 찬양과 감격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죽어야 할 자는 죄인인 바로 난데,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 이 감격이 사라지면, 진정한 헌신과 봉사는 할 수 없습니다. 이 감격이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형식에 불과 합니다. 이 감격이 없을 때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라 그저 허공을 울리는 노래일 뿐이고, 감사 대신 불평이 자리 잡게 됩니다.
변함없고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값없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오늘도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감격으로 예배드림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법대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간직한 자답게 승리하며 사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 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주신 가장 큰 은혜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었고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을 나타낼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감사 표현입니다. 모닥불을 피우고 벌레 한 마리를 잡아다가 가운데 놓아두고 벌레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꿈틀대며 죽으려고 하면 불 밖으로 끌어내어 놓고 “예수께서 우리를 영원히 죽을 지옥 불에서 이렇게 건져내셨다”라고 하며 춤을 추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은혜 중에 은혜, 제일 큰 은혜는 은혜를 아는 은혜이며,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본문의 마태는 이에 속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를 아는 자가 있고, 받은 은혜를 알지도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자, 받은 은혜를 맡아서 나누어 주는 자(은혜를 맡은 자, 은혜를 누리는 자, 누리는 은혜를 나누는 자)들이 있습니다.
은혜Ⅰ:주신 은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지나시다가 세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 마태를 보셨습니다. 마태의 본명은 레위이며, 마태란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 붙여진 이름입니다. ‘보시고’라는 헬라어 ‘에데아사토’는 단순히 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버나움은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인구 밀집 지역이었고, 큰 무역의 통로였으며, 로마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모든 과수, 토지, 가축, 우물에까지 세금을 부과했는데 마태는 이 모든 세금의 징수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동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요, 매국노요, 착취자로 낙인을 찍고 멸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기에 성전예배도 참석할 수 없었고, 재판관이나 재판의 증인도 될 수가 없었으며, 식사도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산중에는 사자가, 거리에는 잔인한 세리가 있다’라는 유대인의 격언을 보더라도 당시의 세리가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헌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태를 관심을 갖고 살피셨으며, 그가 죄를 행하였고, 죄를 행하고 있었음에도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베푸신 은혜요 마태에게 임하신 은혜입니다. 부르심은 은혜를 주심이요, 부르심을 받음은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로서 받는 대상의 가치나 공적에 상관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따라서 은혜(Grace)는 호의이며, 은사(Gift)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와 있고, 항상 베풀어지고 있으며, 주시는 은혜에서 제외된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은혜 밖에 있느냐 은혜 안으로 들어가느냐?입니다. 은혜는 주어진 사랑인 동시에 선택의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고 하신 은혜는 네가 현재 있는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이요, 과거의 삶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재창조를 위한 것이요, 구원을 주시고자 하심이며, 제자로 쓰시기 위하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를 싫어하고 질시하며 기피하고 미워해도 나는 너를 부른다. 네가 의인이고, 잘나고, 똑똑하고, 호인이고, 선인이어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네가 죄를 짓고 있지만 나는 너를 부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심은 인간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부르시는 것입니다. 17세기 중반 영국의 첫 공화제를 선포하고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은 신앙이 돈독한 청교도였습니다. 그는 음식을 차려놓고 늘 “사람들 중에는 먹을 것이 있어도 식욕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식욕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먹을 음식과 식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했답니다.
은혜Ⅱ: 받은 은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마태는 물질적 풍요가 보장된 직업, 버리고 떠나기 힘든 부자의 생활을 지체도, 주저도 아니 하고, 즉시 포기하고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해서 마태는 주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축복이 임하는 조건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은혜, 이 은혜를 알게 되었을 때만이 포기가 가능하고 포기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와진 은혜, 내가 받아야 가치가 있고 내 삶 속에 새로운 복이 와 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가장 행복해지고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됨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내 것으로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은 내 생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으면 나는 상승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받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판단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우매한 자는 은혜가 와 있음에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깨닫지도 못해 주시는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마태가 만약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 하지 아니하고 ‘아니오’라고 했더라면 그는 끝내 세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 하고 주님을 좇았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자라고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한 자는 주님께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 ‘아니오’는 내 미래의 갈림길입니다. 마태의 선택이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바보, 손해, 희생 같으나 결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포기란 지금 내가 나를 아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며, 이 버림은 은혜의 내일을 풍성히 가져옵니다. 은혜를 받는 자는 가장 지혜로운 자요 천국을 소유한 부자 중의 부자이며 영생과 구원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er)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에게 찾아왔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신자가 되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요?” “램프의 심지에 얼마동안 불을 붙여야 빛을 발합니까?”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그 영혼에서 타오르게 된답니다.” 은혜를 받는 순간은 축복의 시작 순간이며, 삶이 변화 되는 찰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1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왜 40년간이나 걸렸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깨닫는 기간이 40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은혜의 땅을 정탐하러 들어간 열두 명 중 열 명은 은혜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고, 받지도 못하고 나와서 엉뚱한 소리만 지껄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은혜의 땅의 은혜를 보고, 알고, 받고 나왔기에 은혜의 소리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사가랴 제사장은 세례 요한을 주신다는 은혜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벙어리가 되었다가,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자 은혜를 시인하고 서판에 ‘요한’이라고 쓰매 곧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습니다. 주신 은혜를 은혜로 알고 받음과 알지 못해 받지 못함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은혜Ⅲ : 은혜 감사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 일어나 좇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잔치를 배설함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기쁨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요. 전 날의 동류, 동관들과의 확실한 송별인 동시에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전도의 목적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목표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도하는 사명감을 갖고 기쁨으로 삽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가 하는 것이요. 기쁨은 은혜 받은 자의 것입니다. 감사의 생활은 타인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자 스스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함은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거나 소원이 이루어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고, 좇게 되고, 주의 일을 하게 되고,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 이 모든 것들이 이미 은혜 받은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은혜를 받으려기 전에 은혜를 아는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주시는 은혜에 차별이 없고 받는 은혜에 구별이 없습니다. 인생의 최대 발견은 은혜를 아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은혜를 아는 은혜의 자리까지 들어간 사람은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바꾸어집니다. 마태가 은혜를 알게 되자 세관에 앉아 돈을 착복하는 재미의 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즐거운 생이 되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건만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와서 사례했습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책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받았으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떠난 자들입니다. 허나 사마리아 문둥이는 은혜를 아는 은혜에까지 도달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고 난 후에 인정이나 감사 인사, 칭찬을 들으려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좇으며 주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잔치를 여십시오. 은혜 안에 거하게 되면 봉사와 감사가 합일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땀도 나고, 억울함도 당하고, 비참함에도 처하고. 숨도 헐떡거려야 할 때가 허다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기독교인들은 나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은혜에 이르도록 말씀을 묵상하고, 정욕과 향락을 완전히 끊는 날들로 만들어야하며,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사는 환희의 날을 맞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기반은 세상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과거 죄인이었던 것,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먼저 기억하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함을 알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주의 신실한 일꾼들이 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꾼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일에 앞장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고, 비록 비방을 받던 자이나 주님의 일꾼으로 사용되며,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인들인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사는 것을 기억하면서, 늘 축제 속에서 주안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사역에 모두 동참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잔치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레위처럼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예수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날마다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 영혼 속에서 예수님을 상석에 모신 잔치가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행복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면 하늘나라에서도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의 잔치가 열려서 하나님도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의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늘나라에서도 잔치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