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이사람을 보라(요19:1-16)

 
특별새벽기도자료(11) 이 사람을 보라(요19:1-16)

인간의 참 모습은 극단 상황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평안할 때는 진실이 숨겨질 때가 많고 또 일이 잘되고 무사할 때는 의가 감추어질 때도 많습니다. 선 인지, 악 인지, 의인 인지, 죄인인지, 사랑 인지, 미움 인지, 알 수 없게 혼돈 될 때가 있지만, 극단 상황에 오면 그 진실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과, 칭찬과, 부귀와, 그리고 분에 넘치는 형통과 성공 뭐 이런 때는 무엇이 의 인지, 악 인지 알 수가 없 습니다. 그저 거짓된 자도 영광을 누리고 그리고 위선도 진실한 선처럼 통할 때도 있지만 재난이 있고, 가난과, 질병과, 실패와 수욕, 고독, 그리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이제 모든 거짓은 다 물러가고 진실만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특별히 극단적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그 존재 자체가 확실하게 노출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대로 말하면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묻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모습이 드려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하실 때 병 고치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하나하나 돌보고 계실 때 좀 더 확실하게 주님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결정적으로 주님이 주님 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역시 십자가 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교훈, 십자가를 생각지 않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대단한 것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그에 교훈과, 그의 능력과, 그의 본능들이 다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게 되고 재해석 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나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신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또 읽고, 또 읽고 깊이 명상해 보세요. 그러면 앞이 환하게 보일 것 입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 예수님의 인간 존재의 모습이 바로 빌라도 앞에서 확 들어나게 됩니다. 분명해 지고 아주 선명해 집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조용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흔히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건 하나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빌라도 법정,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은 잘못된 재판에 의인을 죄인 만드는 재판을 흔히 역사적으로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된 재판에 대표적인 아주 극치적 상징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에 모습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시는 확실한 말씀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세상에 취해 있고, 권력에 취해 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알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를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앞에 섰습니다. 그는 지금 죽음 앞에 섰습니다. 모순된 재판 앞에 섰습니다. 결과를 다 알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조용히 명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들끓는 생각도 없고 번요 분요한 마음도 없습니다. 이미 결론을 다 가지고 조용히 섰습니다. 침을 뱉든지 가시관을 씌우든지 홍포를 입혔다 벗겼다 하든지 갈대로 치든지 말든지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하지 않고 조용히 서 계시는 침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알리가 없습니다. “이 이상한 사람 좀 보라 이 사람을 보라”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이해할 수가 없는데 특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죽음 앞에서의 담담함 입니다. 빌라도는 죽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뒤에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고요함이라 조그만 어두운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구차한 변명도 없습니다. 살아보려고 요리조리 몸부림  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 변명이 없이 죽음 앞에 담담히 섰습니다. 십자가에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 거기에 위대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빌라도는 들어서 압니다. 그가 얼마나 능력을 행했다는 것을 병 고친 사람, 고침 받은 사람,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야기, 바다를 고요하게 한 이야기, 많은 사람이 따른다는 것 왜 빌라도가 모르겠습니까? 옳은 정보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결정적 시간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인 사람인데 왜 이 시간만은 무능하게 아무 능력도 없이 초라하게 이대로 서 있느냐 이거죠. 그런가하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이 여기 끌려 왔다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재사장과 바리세인들 서기관들이 이들이 음모를 해서 자기 인기가 떨어지니까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 알고 이것을 잡아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 결심한대로 행하고, 말씀한대로 행하고, 가르친 대로 자기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침묵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지금 예수가 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계속 그 얘기를 합니다. \"무죄하다 무죄하다\" 그러면 무제하다는 것을 알면서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빌라도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생명을 다 위탁해 버렸습니다. 바로 어젯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에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하는 순간 모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 후로 상황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누가 배신을 하든 누가 침을 뱉든 누가 욕을 하든 그런 이야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 하고 관계에서 이미 일은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침묵입니까 이것이 침묵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오히려 두려워했다고. 예수님에게는 영적 군세가 있습니다. 일본 카톨릭 문학가인 엔또 슈사크가 쓴 침묵이라는 책을 보면 세반스티안 노드리얼 이라고 하는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 찾아와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보도미에 이에야스가 기독교인을 모조리 잡아 죽이게 됩니다. 큰 핍박에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순교 사화를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기록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사람들을 죽일 때에 나가사키 영주인 이노우에가 고안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후미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미에 그림을 밟는다는 뜻 입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그런 이상한 제도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진을 동판에다가 그린 그 그림을 이런 판자 쪽에다가 또 붙여놓고 이걸 땅에다가 논 다음에 뭐 확실한 그림도 아니지요. 대층이 사람에 얼굴처럼 그려놓고 이 예수님에 그림이다. 예수님에 얼굴이다. 이렇게 해놓고는 이걸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고 이걸 밟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죽인다 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 그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밟는다는 것은 신앙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사실 이것을 처음에 만들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인을 살려주기 위해서 만든 법인데 의외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을 줄 몰랐답니다. 여기서 바로 이 후미에라고 하는 이 사건 앞에 로드리어 신부가 딱 서게 됩니다. 그는 밟으면 살고 지나가면 그가 그림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로드리 신부의 귀에 예수님에 말씀이 들려왔답니다. \"나를 밟아도 괜찮다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나를 밟는 너의 마음이 몹시 아플 거야. 오늘날 까지 나의 얼굴을 밟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에 마음도 아플 거야. 밟히긴 하지만 나는 네가 마음으로 아파해주는 그 사랑으로만 충분하다 밟아라\"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로드리에스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바닷가에다 세워놓고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물이 들어와서 민물이 차올 때 사람들은 물속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부가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 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다시 주님에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침묵, 빌라도 앞에 서 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세요. 여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픔과 고난에 내가 동참하고 있노라\" 여기에 신비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조용히 침묵하시는 주님에 모습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조용히 주님과 함께 고난에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니다.
  
가시 면류관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눈썹 한 번 치켜 올리시면 가시 면류관을 엮는 군병의 손을 마비시킬 수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사건 중에 가장 놀라운 부분일까?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분이 자신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은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달아날 때도 그분이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아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남녀 죄인들의 온갖 죄를 대신 뒤집어  쓰시면서도 주님은 자기변호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천국의 법정에 무수한 유죄 판결이 울려 퍼지고 빛의 창조자가 죄인들이 가득한 밤의 냉기 속에 버려졌을 때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에서 사흘을 보내신 후 환한 웃음으로 부활의 아침 햇살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시며, 초라한 루시퍼에게 “그것이 제일 센 주먹이더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심지어 그 부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멋있다.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그러나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예수님은 우릴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고백과 헌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라는 신앙 고백이 모든 상황과 시간에 적용되고 있습니까?  
저희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했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게 하시고, 친히 죄인들의 변호자 되어 주신 주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