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숨은 믿음의 사람들(요19:28-42)

숨은 믿음의 사람들(요19:28-42)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애원하는 것이 \"목마르다\"는 애원입니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치더라도 이것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금방 피가 응고되고 대신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온몸을 말려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극도의 갈증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름, 한 달씩 목숨이 유지되며 십자가 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한 방울만 혀에 찍어 달라는 애원을 하다가 숨지는 것입니다. 마치 생선을 햇빛에 말리듯 사람을 말려 죽이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주머니가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자신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배반당하고 찢기우고,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 5)

그러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 몫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는 상 받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을 채우는 일보다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그들을 위한 음료로 내어주시고 그들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소리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주면서 자신은 끝내 목말라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조롱처럼 신 포도주가 여러분 입에 물려질 때라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기한 부적입니까? 여러분 몫의 십자가를 기다리는 구원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골고다의 십자가들이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마르다\" 고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생에게 가장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일시에 다 해결하신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기적 같은 대 사건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이 놀라운 은혜들이 모든 성도들의 삶에 풍성하게 임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운명하십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이 이미 죽으신 것을 알고 다리를 꺾는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냅니다.

모든 것을 성취한 죽음 (19:28~37) 죽음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성취와 증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전과 후는 구약의 암시와 모형으로 설명됩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유도된 신 포도주의 들이킴은 시편 69:21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4:34). 이 완결성은 죽음 후의 과정에서도 계속됩니다.

왕의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19:38~42)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즉시 열매가 맺힙니다. 그동안 소심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을 계기로 담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해 몰래 믿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인적이 드문 밤길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협력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최상의 영광으로 모십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이들은 독수리 밥이 되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은 장례에서만큼은 왕의 대우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영광(요 12:16, 23; 17:1)으로 정의하며 기다리셨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소심했던 두 제자가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들이 치른 장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히 증언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암송되듯이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셔서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마지막에 충성을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언제 어디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 번 밤중에 찾아온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고관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며, 특히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철저한 성서적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숨은 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신빙성은 없습니다. 언제 또 다른 자극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어도 자기 체면, 위신,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믿음 위에 선 뒤에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일 때가 문제이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가장 확실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없는 믿음은 비판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비판 있는 믿음은 비판 앞에서 튼튼하게 서서 신앙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신앙은 화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중에 깊이 들어가고, 특히 환난 때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극적인 변화로 분명하게 중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태부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특별한 감동 없이 믿음이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 희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전자에 비해 자기의 신앙이 든든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자의 신앙은 어떤 계기, 즉 사건을 만나면 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자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야단스럽게 화끈하게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중에 깊이 든든하게 자라나는 것이 지성적 신앙입니다. 분명하고 저력이 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 집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인정은 하면서도 충성이 없고, 자기를 부정함으로 소극적이 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사건 앞에서는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맡았던 군사들을 지휘한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라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거나 오천 명을 먹였을 때에,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서는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중심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다가 다시 병들면 어찌합니까? 돈을 좀 벌었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다가 손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병 고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람은 약간 걱정입니다. 죽을 때에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지만, 그러다가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떠나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낙심한다면 이런 신앙은 참으로 문제가 많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증거의 초점은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적인 축복이나 어떤 이적에서 찾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행하는 이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미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위탁이 없을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정은 하나 전적인 위탁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확증하게 됩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죽음에서 드러난답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끝까지 보아야 하고 마지막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보면, 살아생전에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을 잘 맺도록 소원하는 것은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가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죽여 놓고서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결론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 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사실화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제서야 예수가 누구며, 이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합니다. 깨달은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 숨은 신앙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빛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지위를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동정했다가는 예수님과 공동 운명에 들어갈 찌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위험한 시간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신앙입니까?
  
생명용품의 길
인생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을 많은 사람을 살리며 살아갈 수도 있고,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도리어 많은 사람을 해치면서 허망한 공동묘지로 치달을 수도 있다. 전자가 자기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가꾸는 자라면, 후자는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을 어리석게도 죽음용품으로 소진하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컷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골고다 위에 세워진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의미인데 해골의 정수리에 꽂힌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해골 위로 흘러내립니다. 그 보혈을 타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이 해골에 임합니다. 마침내 생명의 보혈로 수혈 받은 해골이 생명을 얻고 되살아납니다. 확실히 해골의 정수리에 꽂힌 십자가보다 더 강렬한 복음의 상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달려가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죽음으로 열매 맺는 한 알의 밀’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순교자적 삶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 사회가 골고다처럼 절망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골고다 언덕이기에,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한없는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작은 삶을 통하여, 골고다 곧 해골과 같은 이 세상이 부활의 언덕, 새 생명과 새 역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신 뜻을 이제 제 안에 허락하소서. 제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은총을 비추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