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삶(롬12:1-13)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롬12장1-13)


미국의 어떤 인생 상담가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여러 가지 들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가능하면 날마다 동이 트는 광경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으레 오고 가는 듯이 보이는 아침과 저녁에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치던 것을 새롭게 보면, 분명 삶의 활기를 강하게 느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이 트는 것을 보려면 먼저 고요한 새벽을 보아야 하고 인공 건조물이 가능한 적은 곳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이렇게 사순절 기간 수십 일을 매일같이 고요한 새벽을 깨우며 그 새벽을 첫손님으로 만나며 그 경건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매일같이 결단하고 간구하고 소원을 아뢰는 것은 새벽뿐만이 아닙니다. 평소 잊고 살던 황혼과 노을도 매일 볼 수 있다면 고단한 일상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꼭 보지 못해도 좋습니다.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과 마음속의 노폐물을 상당히 걸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친 세상살이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은 이처럼 평범한 곳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역전인생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국민의 스타가 된 것은 알고 보니 복권이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복권에 대한 자기 입장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3대가 연달아 벼락 맞아 죽을 확률에 기대를 걸고 왜 남 좋은 일 시키느냐\"고 강경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어찌 되었거나 1주일 동안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으니 나쁠 거 없지 않으냐\"고 항변하면서 시류에 휩싸여 그럼 나도 한번, 하고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복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복권 당첨되어 좋은 일에 쓰면 좋은 일입니다.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꽤 하고, 장학금도 제법 지급하고, 돈만 된다면, 그 돈으로 거룩한 일에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아니 잘 사용하려고 그러기만 한다면 다 무죄하고 오히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생각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벌어 어떤 좋은 일에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권의 열풍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돈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상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가치가 상실된 돈이라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가요? 역전되어도 좋을 인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일까요? 멀고 먼 길을 돌아 겨우 찾아낸 이 길,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애썼던 많은 시간들,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삶의 비밀들, 공들여 맺은 소중한 관계들과 그 관계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들은 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인생이란 것이 일확천금을 얻는 것으로 한 번에 역전될 만큼 만만한 것인가요? 치사하게 돈 가지고 사람의 꿈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인가요? 뭐가 어찌 되었거나 얼마의 돈으로 1주일 동안의 즐거움을 사기 원하지만 복권보다 더 즐거운 일들이 우리들 가까이 없을까요?

로마서는 구원의 도리(파노라마)를 사도 바울의 논리 정연한 필치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본다면 구원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원의 비밀을 선포하면서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말씀인 12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구원의 도리 즉 교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씀하시고 이젠 구원받은 자로서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여 주는 뿌리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생활은 삶을 아름답게 하여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도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삶을 살면 안 되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가장 큰 병패가 있다면 예배와 생활의 분리일 것입니다. 이성으로 깨달아지고 감정으로 뜨거워진다고 해도 실제로 주의 일에 시간과 몸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은 거룩한 삶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내 몸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주님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하는 것은 주님께 부름 받은 자, 헌신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아닌 믿음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알고, 배우고, 행하고, 순종합시다”. 주님은 차가운 논리와 이론을 원치 아니하시고 뜨거운 가슴을 원하십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앞날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은혜 받은 자와 메마른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은혜 받으면, 믿음 있는 자는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귀한 줄 알고 주의 몸 된 교회가 귀한 줄 알고 주님이 주신 직분이 귀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신 직분이 귀하기에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들이 지금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제물은 되지 않고 자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지는 자가 이기고 낮은 자가 높은 자라는 원리를 알면서도 막상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된 몸을 원하고 계십니다. 몸과 마음을 다한 정성의 예배를 원하시고 몸과 마음을 다한 충성을 원하십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배라는 것이 단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하여 있는 현장에서 우리의 부패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의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산제사는 우선 찬미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벌려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바로 산제사입니다. 찬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적을 체험하고 억눌린 현실에서 구원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온몸과 전 삶을 통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산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는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흠이 없는 것\" \"부정한 것이 없는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세속에 물들지 않은 진실 되고 거룩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두 가지 원리
본문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세대를 본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믿음의 순수성을 세상에 다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발목 잡혀서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의미로서 \"하라\"는 말씀인데 본문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음은 행동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모든 행동지침들이 지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고 지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고...\" 라고 한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결심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하고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심 3일이라도 좋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먹으면 3일 동안이라도 새로운 생활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예 새로운 마음을 먹지 않으면 언제나 그는 세속에 물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까이하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의지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맥스웰 말츠가 말하기를 새로운 습관 하나를 형성하는 데는 최소한 21일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품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굳지 못함을 빗대어 이르는 말입니다. 작심삼일을 극복하는 방법은 삼일에 한 번씩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삼일에 한 번씩 작심하려면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를 자꾸 의식해야 합니다. 의식을 깨도록 도와주는 것이 독서입니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의 중요함을 쟁점으로 다룬 책을 가까이 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독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영혼이 살찌고, 의지력이 강화됩니다. 변화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됩니다. 영성 회복을 위한 독서를 통해서 의지력이 강화되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성경입니다. 영적 독서는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신앙도서나 번역서 등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하는 과정까지가 해당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루이스(C.S. Lewis 1900-1963)는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인데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무한정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하면 좋은 것\"(Nice to Do)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Survial Issue)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한다느니 국가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느니 혹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우선순위는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 주위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부터 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행복한 삶을 위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반복적이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자동차 관리를 게을리 하면 상태가 나빠져 갑니다. 텔레비젼만 오래 보다보면 멍청한 상태가 되어갑니다. 무엇이든지 소홀히 하면 그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요,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라고 또한 가족이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돈독하다고 생각하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냉랭한 껍데기만 남고 형식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료함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에 사람들은 따분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것은 무료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안에 안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는 흥미롭지만 불안정하고 생소합니다. 사람들은 안정 속에 변화를 원합니다. 익숙해진 습관,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데 이것을 개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쇄신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은 반복적이며  모든 일은 무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을 의미 있게 보내자면 개혁을 하고 쇄신을 해야 합니다.

(1)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아의식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능력이 없으며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자아의식을 쇄신하여 긍정적 자아의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2) 가족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 가족과의 관계는 이 세상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에 아무리 힘을 기울여도 참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가족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족과의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여기에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오늘날은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 뿐 각기 자기 생활에만 몰두하여 가족 사이의 유대관계를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먼저 하는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고싶어 하면서도 실제는 \"긴급한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긴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하지는 않으면서도 긴급한 일을,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하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위한 일은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3)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타성이 붙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타성이 되면, 무료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게 됩니다. 타성이 된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고 율법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족인 교인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돈으로가 아니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제 안에 영적이고 고상한 습관들이 형성되게 하소서. 날마다 내면의 은밀한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며, 오늘도 만나는 사람, 해야 할 업무를 대할 때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