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탐욕을 버리고 자족한 삶을 (눅12:13-23)

탐욕을 버리고 자족한 삶을 (눅 12:13-23)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회성을 갖춘 인간
피조된 생명체를 통하여 몇 가지 비유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① 주는 것만 받아먹고 활동하지 않는 식물인간입니다. 매사에 피동적이고 어린 아이적인 사고로 사는 인생입니다. ② 남에게 붙어서 기생하는 기생충 인생입니다. 자립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에게 의존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남의 피를 빨아먹는 남에게 해독을 주는 인간입니다. ③ 제 발로 먹이를 찾아 먹는 동물 인간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라도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④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순복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회성을 갖춘 인간입니다.

하루는 돼지가 젖소를 찾아와 불평했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한테 인기가 없을까?\" 사람들이 젖소 너는 대단히 창찬하면서 왜 나는 칭찬하지 않을까? 너는 우유와 버터만 주지만 나는 모든 것을 주며 심지어 나의 족발까지 삶아 먹잖아!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왜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할까? 이 말을 들은 젖소는 한참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주기 때문일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 무엇을 할까? 도 중요하지만 지금 어떻게 사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비난할까? 내가 죽은 다음에 자선 사업기금으로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헌납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하더랍니다. 분명 그는 젖소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담에 \"내일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젖소처럼 살아있는 동안에 주면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고 살 때 잘못하면 돼지처럼 착각 속에서 고민하게 되고 기쁨이 없는 무미건조한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잘못된 행복관\"을 지적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준엄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반드시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13절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 중에서 자기에게 돌아 올 몫을 형에게 빼앗긴 동생이 예수님께 그것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고 지적하셨습니다. 여기 생명이라고 번역한 말은 \"행복\" 이라고 바꾸어서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생명과 참 삶은 우리가 얼마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곧이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에 대한 가장 큰 오해가 있다면 사람들이 행복을 소유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강력하게 소원하고 있기에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잘못된 행복관을 가지고 있으면 못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을 소유에 둔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돈을 위해서라면, 인정도 사정도 없고 배신도, 배반도 얼마든지 합니다.

주님의 비유 중에 나오는 부자는 돈을 모으는데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지만 주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본문에 「내 혹은 내가」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에게는 이웃도 없고, 사회도 없고, 물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습니다. 창고가 차고 넘쳐도 이웃에게 베풀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완전히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풍성한 소출도 자신의 노력이었고, 마음의 평안은 물질이면 족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곡간의 곡식으로 연장될 줄로 알았습니다. 실로 그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부유한 자 같이 보여도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참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부자의 어리석음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탐욕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입니다. 탐욕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미덕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또한 물질적인 부를 위해 열심히 사는 노력에 대해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경계하시는 점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탐욕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십니다.

탐욕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입니다.
13절, 형의 탐욕 : 부자의 탐욕 14절, 동생의 탐욕 : 가난한 사람의 탐욕
부모가 재산 상속을 제대로 못해주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의 몫까지 가로챘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한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와 형에게 빼앗긴 분깃을 찾아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평한 분배가 아닌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니라\"(15절).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적게 가진 사람이나 탐욕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탐욕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죄악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생명\"이란 말의 헬라어 \"조에\"(ζω?)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의 의미가 아닌 \"질적인 삶\" (quality life) 즉 의미와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행복한 인생은 단순히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주십니다.

탐욕은 우리의 이기심을 \"조금만 더!\"하고 살찌우는 죄악이다.
세기적 부호 록펠러에 대한 인터뷰 일화입니다. 한 기자가 호기심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당신은 현재 당신이 가진 재산으로 만족하시나요?\"\"천만에, 전혀 아닙니다.\"록펠러는 아주 강력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기자가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하고 다시 묻자 \"조금만 더!\"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조금만 더\" 모든 사람들은 조금만 더 가지면 그만 두겠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 조금 만 더는 죽어야 끝이 납니다. 병적 이기주의자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지옥이란 말의 \"무저갱‘은\"바닥이 없는 심연\"입니다. 탐욕은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웃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죄악입니다. 16-19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나\"입니다.

부자로 살겠다는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나만\"잘 살겠다는 것이 죄악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나쁘다는 가치를 가르칩니다. 오늘 성경의 부자에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탐욕은 이웃과 문을 닫고 사는 죄악입니다. 부자의 언어 속에 \"잊혀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나의 존재의 의미는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습니다. 부자가 되기까지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혼자 부자 될 수 없습니다. 많은 농사꾼이 도왔습니다.\"품삯을 주었으니 그만\"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내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탐욕을 이기려면 십일조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일조 정신은\"헌금의 십일조‘,\"회식의 십일조’,\"구제의 십일조‘가 있습니다. ’‘나눔\"이 강조되는 정신이 십일조입니다. 농작물을 수확할 때도 밭모퉁이 일부를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몫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삭을 주인이 주워서는 안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옛 우리의 선조들은 나무 열매도 새 밥을 남기고 땄습니다. 현대 교회가 이웃과 함께 나누고 섬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면 십일조 정신을 살려야 합니다.

탐욕은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생명도 재물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한시적으로 빌려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따라 잘 관리해야합니다. 탐욕은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사는 자기숭배요 우상숭배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3:5-6).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를 염려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이 하는 염려입니다(마6:25-33). 탐욕은 주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진정한 부자의 고백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구원자이며 희망이십니까?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인 것을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여러분의 오너(owner)가 누구이며 여러분의 CEO가 누구입니까?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진정한 오너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CEO 이십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물질을 바르게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요, 물질은 사용의 대상입니다.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며, 소유를 탐하다 괴로워하지 말고 나눔으로 자유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삶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감사하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감사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밭에 있는 풍성한 소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은총입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 곡식은 하늘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영혼의 안식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몰랐거나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살 것을 다집해야 합니다.  

이율배반
잠자리 한 마리가 가만히 풀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있는 힘껏 잠자리채를 휘둘렀습니다. ‘윙’하고 바람 갈라지는 소리에 잠자리는 날개를 폈습니다.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잠자리가 아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어린 너한테 잡힐 뻔 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잠자리는 온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하다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는 잠자리를 보며 거미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거미줄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움직여 봐야 소용없어, 움직일수록 더 조여들 뿐이니까\" 거미는 재빠르게 잠자리를 먹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 순간, 산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아왔습니다. 산새는 표적처럼 박혀있던 거미를 낚아채듯 물고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신음하는 거미에게 산새가 말했습니다. “거미야, 미안해. 네가 몸을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을 거야\"
우리,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넉넉해질 때도 있습니다. 나, 혹시 듣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길을 묻고 나서 그이가 아무 말 없이 지나가 버린 걸 가지고 ‘그놈, 참 몹쓸 놈이고\" 하지는 않았는지, 나, 행여 의족을 하고 버스에 앉아 가는 다리 불편한 젊은이 곁에 서서 가면서 ‘요즘 젊은 놈들, 어른도 몰라봐\" 하며 속으로 욕하지는 않았는지, 다시금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