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시험이 찾아올까요? (약 1:12-15) 사랑하기에 주는 시련 (약1:12) 대개 사람의 불행은 재물을 복으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복은 물질적인 복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지경이 넓혀지고, 시야가 넓혀지는 것이 성경적 복이며,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과 사람을 주시는 것도 성경적 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이 개념은 복 있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온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는 것 자체가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시험을 참는 것이 복일까요? 미래에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알면 가슴이 덜컹 하면서 정말 우리 교회 성도들이 시험이 없기를 기도하기도 하지만 시험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시험에서 승리하기를 더욱 기도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험이 있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당연히 그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은 그 순간에 우리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험을 잘 치루기를 사랑과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성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시험 중에 있다면 그때가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 와서 성원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다면 시험이 복으로 통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자보다 시험이 있는 자가 복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에게는 마귀가 시험을 걸지 않으며 가망이 없는 자에게도 마귀가 대들지 않습니다. 싸움도 서로 상대가 되어야 싸움이 되듯이 시험도 시험 걸만한 인생이라야 겁니다. 끝난 인생, 다된 인생한테 무슨 시험을 걸겠습니까?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괜히 자극하면 오히려 삶의 투지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귀의 시험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간접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있음은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사자는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맹수 중에 사자는, 죽은 고기는 먹지 않고 살아있는 동물만을 공격하여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움직이는 동물은 사자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사자와 같이 움직이는 성도, 살아있는 교회, 생명 있는 공동체를 삼키려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사단도 움직이지를 않고 우리가 충만하지 않으면, 사단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며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으면, 사단도 우리 곁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려고 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하고, 성령을 갈망하고, 충만을 향하여 나아가면 사단은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단의 전략은 성도들을 잠들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겨우 교회만 출석하고, 겨우 근근이 목숨만 붙어 있는 기독교인으로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고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기도를 멀리하고, 예배를 습관적으로 드리면 사단은 그 사람을 삼키려 하지 않습니다. 죽은 고기는 먹지 않는 사자의 본능 같은 것이 사단에게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죽은 성도, 잠든 성도, 병든 성도들과 상대하지 않으며 마귀의 대상은 충만한 성도, 깨어있는 성도, 기도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입니다. 신앙세계에는 회색지대가 없으며 영적인 세계에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구원 받은 것도 같고, 안 받은 것도 같고 충만한 것도 같고, 허기진 것도 같고 깨어 있는 것도 같고, 잠들어 있는 것도 같은 현상은 없습니다. 천당과 지옥 사이에 중간지대가 없듯이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어 있는 것이고,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 안 받은 것이고, 충만하지 않으면 안 충만한 것이고, 영적이지 못하면 육적인 것이고, 신령하지 못하면 세속적인 것이고, 은혜의 영향권 안에 없으면 은혜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고, 주님 사랑하는 맘 없으면 세상 사랑하는 맘 충만한 것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시면 마귀의 도구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힘을 내어 깨어 있기를 힘써야만 합니다. 지금 사단은, 영적인 교회, 믿음으로 살려 애쓰는 성도들, 신령한 가정을 노려보고 삼키려 합니다. 돈 버는 것 보다 번 돈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듯이 은혜를 한 번 받고, 기도의 줄을 잡고,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도 어렵지만 그 믿음과 받은 은혜를 지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만나를 먹었듯이 광야를 지나는 우리들도 매일 능력을 받아야 하고 매일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해야 하고 매일 그리스도와 만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자전거는 가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그러기에 계속하여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의 페달을 쉬지 말고 밟아야 합니다. 페달을 멈추면 쓰러짐을 의미합니다. 기도를 멈추면, 이미 시험에 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쉬지 않는데, 우리는 쉰다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은혜의 영향권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은혜의 사각지대에 있습니까? 중간지대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어느 편이든 한편을 택하여 뛰고 달려야 합니다. 달리지 않으면, 충만하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삼킴을 당하는 것입니다. 맹수가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지구력을 가지고 뛰면, 결국은 포기합니다. 모든 맹수는 장거리에 약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신앙의 성패는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오래 달리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맹수라도 지구력을 가지고 오래 달리는 동물은 어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오래 기도하느냐? 얼마나 오래 말씀 앞에 머물 수 있느냐? 얼마나 오래 예배할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살기위해서 우리는 달려야 합니다. 잠들면 죽게 되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은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는 길 뿐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기 때문 시험을 소극적으로 무작정 당하면 슬픈 일이지만 적극적으로 참는 것이라면 성숙한 삶의 지혜가 생깁니다. 시험이 있을 때 아이고 망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 그 의미를 깨닫고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반응하면 믿음, 사랑, 소망, 지혜, 용기 같은 소중한 것들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 자녀들은 대개 부모들의 잔소리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오는 잔소리라고 생각할 때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개입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기분 나쁜 것을 자녀들에게 잔소리로 푸는 것이나 자기의 야망을 자녀들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잔소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느낌이 자녀에게 들면 그 잔소리 및 징계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인 경우가 많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닌 \"참 소리\"로 그 안에 사랑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련을 죄와 연관시키거나, 저주와 심판으로 생각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시련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시련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대개 사람들은 아름답고 편하게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시련으로 사랑 받는 순간도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시험을 쳐야 학생들에게 발전이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을 통해서도 충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억지로 골탕 먹이려고 자주 시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험에 우리가 합격하면 시험 치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준비해서 시험을 아름답게 극복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준비하고 좋은 점수 받지 못하면 또 시험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을 줄이는 데에는 시험을 대하는 나의 신앙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시험은 교훈적인 의미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시험을 통해 잘 교훈 받으면 그 시험은 다음에 면제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을 참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믿는 자가 참을 수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라야 시험을 복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유치한 사람은 그저 돈 보따리나 굴러 와야 복인 줄 알고 손해를 입으면 그것이 저주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시야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시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이 축복과 은사를 믿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여기에서 \"인정 받는다\"는 말은 훈련을 통해 순도가 높아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험에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는데 본인의 죄와 허물로 당하는 시험이 있고 단련을 위한 시험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시험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시험은 바로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우리의 신앙 순도를 높이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때때로 시험을 허락하여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잘못인 것을 알고 미적거릴 때 하나님은 기어이 시험을 통해 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이라는 것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히게 하시고 시험과 사건을 통하여 능력을 주시고 수준을 높이시고 우리의 인격을 격상시키십니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지 마시고, 신앙이 약해졌거나 나약해졌기 때문에 당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믿음으로 참고 기쁨으로 견딜 때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되고 마침내 천국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시험을 당할 때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부부싸움을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야 본래 좋은 사람인데 당신하고 살면서 나빠졌다고 하며 그 나빠진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내 탓은 죄를 끊는 동기부여를 하지만 남 탓은 나의 죄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그 잘못된 일이 정말 환경 때문에 생겨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환경은 큰 이유가 아닙니다. 지난 다음에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 그 길밖에 없었습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탓이 아닙니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가난하면 도적질을 해도 됩니까? 화나면 살인을 해도 됩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환경 탓이라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나만 그런가?\"라고 하면서 다 그렇다고 보편화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내 죄는 내 죄이고, 자기 잘못은 자기 책임입니다.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기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깜빡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실수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할 수 있는 씨앗이 이미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고 하며 은근히 책임의 초점을 흐린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단단히 결심했다면 그 사건에서 충분히 시험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해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지 애초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자기 책임을 항상 마귀 탓으로 돌린다. /마귀가 중간에 장난해서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가장 고약한 태도이고, 가장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설사 마귀가 중간에 장난을 杉鳴?할지라도 내 마음과 의지를 통해 벌어진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가 될 줄 몰랐다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미숙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태도는 자신이 자신을 과보호하려는 태도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과보호하면 버릇이 나빠지듯이 자신을 과보호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쁜 태도가 체질화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요원해지고 시험을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잘못을 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남이 나를 보호해 주는 역사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내 탓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고, 축복된 자리를 향한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시험이라는 문제를 통해 그 사실을 도전해 주고 있습니다. 왜 사람에게 시험이 찾아올까요?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원인은 세상이 아니고 환경도 아니며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시험은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내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영적으로 부족해서...\"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원망의 자리\"로 가게 됩니다. 원망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을 보면 진실한 삶의 모습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하와를 대하는 아담이 일이 잘될 때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더니 일이 잘못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저 여자가\"라고 여자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여자를 주신 하나님에게까지 원망을 돌립니다. 처음에는 남 탓, 환경 탓이요, 좀 더 나아가면 조상 탓이요, 마침내는 하나님 탓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원망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절망은 자신을 무너뜨리지만 원망은 남을 아프게 하고 무너뜨립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하는 죄를 지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내 책임을 항상 먼저 생각하고 슬기롭게 어려운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 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