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36/ 욥의 첫 번째 답변과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I)/욥40:1-14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에 대한 욥의 대답과 두 번째 말씀의 전반부입니다. 첫 번째 발언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주제는 우주 자연을 만들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에서 나타난 계획은 욥이 의심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거나 혼란과 흑암으로 가득찬, 부조리한 것만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가 있고, 무엇보다도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기쁨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신비하고도 장엄한 창조 세계 앞에 하나님은 욥을 세우시고 욥의 부재와 무지와 무능을 여지없이 폭로하심으로서 욥의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마구 흔들어놓으셨습니다. 그런 뒤 이제 두 번째 발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인간식이 아니라 하나님식의 정의로운 통치 방식을 언급하십니다. 인과응보라는 좁은 렌즈로 조망했던 세계의 정의가 아니라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에 기초한 우주적 정의, 즉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랑으로서 완성하는 정의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 주로 자연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강조했다면, 두 번째 말씀은 주로 인간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권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의 결론과 이에 대한 욥의 대답(40: 1-5) 하나님은 첫 번째 말씀을 매우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마무리지으십니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2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을 요약해줍니다. 여기서 욥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으로서 규정됩니다. 욥은 그동안 자신의 무죄를 철썩 같이 믿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무죄와 결백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니 어느새 자기만 옳고 하나님은 그르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어 하나님을 비난하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이와 같이 상선벌악, 인과응보의 법칙의 편협한 시야를 벗어 던지지 못하니 무죄한 자기에게 고통을 내리시는 하나님, 악한 자들을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뭔가 잘못이 있다는 쪽으로 나갔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신비와 장엄함을 열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우주 설계와 통치 방식에 대한 욥의 무지와 무능을 밝히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라는 뜻이지요! 욥의 대답은 예전과 달리 비굴하리 만치 순종적입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4-5절). 더 이상 예전의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욥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죄 주장을 위해 그토록 말을 많이 했던 욥이 단 두 줄 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우주 창조의 계획과 신비 앞에서 자신의 부재와 무지와 무능을 절실히 깨달은 욥이 마침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에서 우러나온 은총과 기쁨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손으로 입을 막겠다는 표현은 입을 닫고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 가서 따지겠다던 법정 소송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욥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 것뿐이지요. 2. 욥이 하나님이 되어 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40: 6-14) 하나님은 두 번째 말씀을 시작하실 때에도 첫 번째와 똑같이(38: 1, 3), 폭풍 가운데서 현현하셔서 욥으로 하여금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당신이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하라고 요구하십니다(6-7절). 여기서 하나님은 욥기에서 다루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 중에 하나, 즉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8절). 빌닷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잘못 하실 리 없으며 공의를 거짓으로 판단하실 리 없다고 주장했을 때(8: 3) 욥의 응답은 매우 비관적이고 냉소적이었습니다. 욥의 현실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시는 불의한 분이었습니다(9: 22). 이렇게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상 통치 방식에 강한 의혹을 보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13: 18; 16: 11; 21: 7; 24: 1-24; 31: 6; 34: 5 참조). 바로 이런 점에서 욥 자신도 그토록 혐오감을 보이며 완강하게 저항했던 친구들의 인과응보론이라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정통 신학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무죄하니 고난을 당해서 안 되고 악인이 번성하는 것(21: 7-13), 역시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가 욥이 벗어나기 원했던 그 함정에 자신도 빠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욥은 이처럼 현실 경험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와 모순에 매달리다보니 점차 자기의에 깊숙이 경도되어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쪽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정의관에 사로잡힌 욥의 모습을 통렬히 비판하십니다.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 하느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유죄를 주장한다는 반박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네가 한번 하나님이 되어 보겠느냐는 지극히 풍자적이고 반어법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마 욥기에서 나오는 가장 흥미로운 구절이 9-14절일 것입니다.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아이러니지요! 네가 그렇게 잘났고 그렇게 공의롭다면 네가 한번 하나님이 되어서 세상을 의롭게 통치해보라는 풍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격으로서 \'힘있는 팔\'과 \'천둥소리 같이 우렁찬 소리\'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팔\'은 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출 15: 16; 신 5: 15; 시 77: 15; 사 53: 1),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장엄함을 상징합니다(시 29: 3; 사 29: 6; 렘 25: 30). 하나님이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 싫다면 이제 네가 한 번 하나님이 되어서 공의롭게 통치한다는 사실을 입증해보라는 것입니다. 즉,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쏟아 붓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보라는 것이지요. 네가 그토록 공의로운 하나님이 될 수만 있다면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들어보고 악한 자들을 짓밟아서 땅에 묻어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그토록 악인들의 번성에 대해서 눈꼴사나워서 보지 못하겠다면 어디 네가 한 번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그들을 멋지게 심판하고 손 좀 봐주라는 일갈이지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의인이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건져내는 활동은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네가 인과응보에 따라 척척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윤리적인 세상을 그토록 희구한다면 어디 네가 한번 권능과 위엄과 영광을 갖추어서 악인을 남김 없이 축출하고 섬멸하는, 공의로 충만한 하나님이 되어보라는 주문입니다! 만일 욥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욥을 찬양하고 욥이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시겠다고 결론을 맺습니다(14절).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일을 욥이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욥을 당신 대신 하나님으로 대접하시겠다는 발상. 아, 얼마나 통렬한 풍자인지요! 욥의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이렇게 뒤흔드는 반어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 세상이 욥이나 세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상선벌악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세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잘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세상 통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욥의 교만과 인간 중심의 짧은 안목을 정면으로 비판하시는 것이지요! 이제 내일 읽을 말씀을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신비 동물로서 욥보다는 훨씬 더 강하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통제하에 있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소개함으로서 욥의 아무것도 아님을 다시 한번 드러내십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여러분이 한 10분만이라도 하나님이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세요. 아마 여러분은 단 1초도 이 세상을 공평하게 통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40: 8-14절은 욥기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신정론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욥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인은 어김없이 상주시고 악인은 빈틈없이 벌주시지 않을까요? 불의하시기 때문에? 무능하시기 때문에? 심술궂으시기 때문에? 사실 욥이 제시한 하나님의 정의는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번영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하나님께서 독재자처럼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힘을 행사해서라도 세상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인간적인 강박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불의를 반드시 뿌리뽑고 의와 선에 대해서는 무조건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어떤 강압성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강압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정면충돌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 의지를 가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득적 자유 의지를 깨부수면서까지 하나님의 공의를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원치 않으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보상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가 자유 의지를 갖고 미래에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사악한 사람을 금방 벌하지 않으시는 이유도 그들이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언젠가 회개하고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이나 친구들이나, 아니 엘리후까지도 그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인간 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인과응보론, 혹은 고난의 교육적 해석이라는 좁은 틀로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경영 이치를 다 재단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이론으로 하나님의 자리까지 찬탈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가장 그럴듯한 해석, 즉 엘리후가 주장한 고난의 교육적이며 목적론적 해석까지도 일체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그 것 역시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한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인과응보론은 자기들의 윤리 정의관으로 하나님을 조종하고 길들이려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기 원하는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자동 판매기에 얼마만큼의 돈을 넣으면 자기가 원하는 과자나 음료수가 정확하게 튀어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가 이만큼 의롭게 살았으니 이 정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든지, 내가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 거기에 비례하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의 기대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우상 제조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세상을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통치하실 수 있지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까닭에 그렇게 기계적으로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유야말로 정의를 뛰어넘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뺨을 치면 왼 편 뺨을 돌리라고 가르치셨으며, 창기와 세리의 친구가 되신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무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절대 자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욥이 만난 하나님은 파스칼의 말대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시는 하나님의 진면목을 일러줍니다! 머리와 관념으로 이해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몸으로 구체적인 삶 한 가운데서 체험한 살아 계신 하나님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