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33/ 엘리후의 네번째 반박

욥기강해33/ 엘리후의 네 번째 반박/욥36:1-37: 24


엘리후는 생각할수록 신비한 인물입니다. 도대체 엘리후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욥의 최후 발언과 하나님의 발현 사이에 끼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후의 마지막 발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네 번째 말에서 엘리후는 예전과 달리 한결 부드러워졌고 번뜩이는 통찰력도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후는 그동안 욥과 친구들 사이에 전개되어 온 논쟁의 모든 요점들을 한꺼번에 총정리 해주는 동시에 인간의 이성으로 고통의 의미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해석, 즉 고통에 대한 교육 훈련적 해석을 제시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엘리후는 세 번째 발언에 이르기까지 이미 욥의 친구들이 제기했던 이슈들, 즉 하나님의 위대성과 정의, 절대 주권과 초월적 자유, 등등을 거의 다 언급했습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엘리후는 친구들이 주장했던 인과응보론을 가감 없이 되풀이하는 듯한 인상도 주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35장에서 주장했던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이어서 강조합니다. 그러나 네 번째 발언에 와서 욥은 고통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깨우치고 연단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매우 고무적인 사실을 언급합니다. 주로 세 친구들과 같은 노선에 서서 욥의 자기의 주장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하던 엘리후는 친구들의 발언에서 이미 미미하게나마 흘러나온 고통의 교육적 해석을 심화시킨 뒤, 하나님의 우주창조 행위에서 드러난 절대적 위엄과 권능을 앞세우며 욥에게 자기의 주장을 접고 겸손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놀랍게도 37: 24절에 나타난 엘리후의 결론은 지혜의 송가 28장의 결론부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 때 욥은 \'주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28: 28)이 지혜라고 했는데, 엘리후의 결론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하며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기의 주장으로 충만한 욥이 겸손해져서 하나님의 임재를 준비하라는 충고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볼 때 엘리후는 결코 욥의 경우에는 부적절한 인과응보의 신학과 하나님의 정의와 주권과 자유에 대한 강조 등을 통과해서, 적어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가장 타당성이 높은 고통의 교육적 해석을 거쳐, 마침내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실천적 지혜에까지 도달하여 욥으로 하여금 한껏 마음을 낮춘 자세로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런 점에서 엘리후는 욥을 겸손하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 직접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과제는 엘리후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에 얼마나 근사한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예컨대 고난의 교육적 해석이 과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해법인지 아닌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젠첸이 지적하듯이 엘리후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참 말씀과 자기의 말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뱀과 같은 선택 제시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변론하는 엘리후(36: 1-21)

엘리후는 자기의 모든 지혜를 짜내서라도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합니다(36: 3). 누차 강조했지만 이것은 욥이 자기의에 집착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수록 하나님의 의는 경감될 뿐 아니라 결국 불의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로 전가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신 까닭에 의로운 욥에게 부당한 고통을 내리시게 된다는 것이지요. 욥의 세 친구들이나 엘리후에게 있어서 이것은 신성모독을 의미하기에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엘리후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흠이 없는 사람을 멸하시지 않습니다(36: 5). 악한 사람을 살려 두지 않으시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십니다(36: 6). 자,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적극 변호함으로서 욥이 결코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한 뒤 엘리후는 깊이 새겨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의로운 사람도 고난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36: 8-12절을 보세요. \"그러나 의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쇠사슬에 묶이게 하시고, 고통의 줄에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한 일을 밝히시며, 그들이 교만하게 지은 죄를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시고, 그들이 악을 버리고 돌아오도록 명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기면, 그들은 나날이 행복하게 살고, 평생을 즐겁게 지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귀담아 듣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고, 아무도 그들이 왜 죽었는지를 모를 것입니다.\"

여기에서 엘리후는 처음으로 의인의 고통 가능성을 언급함으로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고통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엘리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욥의 자기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대전제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에게 고통을 내리신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 까닭에 엘리후는 고난이 연단의 기회가 된다는 교육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8절에서 엘리후는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고통의 줄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욥이 비록 의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고통의 사슬에서 매인 이유는 불순종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인의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했던 일과 교만해서 저지른 죄악을 깨닫게 하십니다. 둘째로, 귀를 열어 하나님의 경고를 듣게 하시고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되돌아오도록 명하십니다. 여기에서 의인이 아무 이유 없이 거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교만 때문에 일시적으로 넘어진 상태에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욥이 주장한 바 자신의 경우처럼 순전히 의로움을 지키는 상태에서, 즉 무흠한 처지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교만 때문에 일시적으로 넘어진 상태에서 고통의 줄에 매이게 될 때 풀려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36: 11). 그러나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면 죽음의 세계로 끌려가 알지도 못한 채 멸망당하게 됩니다(36: 12). 그러니 욥도 빨리 뉘우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경고이지요!

그러면서 엘리후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음도 언급합니다. 고통 당할 때 회개하지 않고 거꾸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도와 달라고 간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36: 13). 이것은 분명히 욥을 겨냥한 말로서 욥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경고하시기 위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욥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지요! 그 다음에 엘리후는 고난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36: 15). 불행이 무익하고 무의미한 징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 교육과 훈련의 유익하고 의미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필할 수 있으며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물을 때 결정적인 해법도 될 수 있지만, 그러나 역시 욥에게는 \'해당 무\'가 됩니다. 왜냐하면 욥은 의로웠다가 교만해져서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결국 고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가 되고 경고를 듣고 깨우치는 수단이 된다는 엘리후의 가르침은 욥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엘리후의 제안도 욥의 딜레마를 풀지 못합니다.

이제 욥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과 심판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엘리후에 따르면 뇌물을 바쳐도 안되고 속전을 많이 바쳐도 안되고 돈과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36: 18-19). 심지어 밤이 찾아와 어둠으로 뒤덮인다고 해도 죄악까지 뒤덮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36: 20). 비록 엘리후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일한 방법은 고통이 하나님의 경고인줄로 깨닫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돈으로도 안되고 명예와 권세로도 안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이치와 마찬가지이지요! 결국 의인의 고통과 관련된 엘리후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본래 욥이 의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교만에 빠졌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이 고통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단시키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되며, 욥이 장차 더 나쁜 길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성을 사전에 차단해준다는 것입니다(36: 21).

2. 하나님의 권능을 변론하는 엘리후(36: 22-37: 24)

이상과 같이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한 뒤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열거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합니다. 36: 22-37: 24절은 바로 뒤이어 38장에서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출현을 미리 예고라도 하듯이 갖가지 기상 현상들을 열거함으로서 온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권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과 38장은 매우 스무드하게 연결된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엘리후는 구름, 비, 천둥과 번개, 눈, 남풍, 폭풍, 얼음, 해, 등등의 대기권의 신비한 현상을 조목조목 들면서 하나님 창조의 권능과 신비를 강조합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물을 증발시켜서 끌어올리시고, 그것으로 빗방울을 만드시며, 구름 속에 싸 두셨다가 뭇 사람에게 비로 내려 주십니다\"(36: 27-28). 이른바 증발, 응결, 강수 등의 단계를 거쳐 물이 순환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지요. 또한 천둥이 어떻게 치는지 번개가 어떻게 휘번쩍거리는지도 사람이 모릅니다(36: 29-33). 눈이 내리고 소나기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일이며 갖가지 바람이 부는 것이며 넓은 바다가 꽁꽁 얼어붙는 이치도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37: 6-10). 하나님은 번쩍이는 놋거울처럼 하늘도 펴서 만드셨습니다(37: 18). 이제 중요한 것은 엘리후가 오늘로 치면 기상학이나 해양학에서나 다룰 수 있는 자연의 신비를 아름다운 시어로 서술하고 있는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오늘의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보면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욥이 살던 시대에는 이와 같은 자연의 조화나 기상 이변이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아래 이루어진 신비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의도는 너무나 선명합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그리고 놀라운 신비 앞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에 비해 인간의 지혜는 너무나 알량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분을 알 수 없고, 그분의 햇수가 얼마인지도 감히 헤아려 알 길이 없습니다\"(36: 26). \"하나님이 명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일어납니다\"(37: 5). 장엄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창조 신비 앞에 인간이 감히 무슨 정의와 지혜를 주장할 수 있느냐는 뜻이지요. 그리하여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주님께서 옳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꾸짖을 자격도 없습니다(36: 23). 다 욥을 겨냥하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상 변화의 이치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자기의를 주장하며 지혜롭다고 까불 거리냐는 것이지요!

결국 엘리후의 결론은 37: 23-24절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가장 크시니, 우리가 전능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실 때에, 의롭게 대하시고, 정의롭게 대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하십니다.\" 두 가지가 강조됩니다. 첫째, 우주만물을 신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의심하지 말라는 일갈이고, 둘째,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있는 척 우쭐하지 말며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충고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후의 네 번째 발언의 후반부에서 하나님 창조의 권능과 신비는 인간의 미약함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38장 이후의 하나님 말씀에서도 그래도 재현되기 때문에 그 때 그 의미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여기에서 새겨들어야 할 교훈은 고통이 하나님의 교육 훈련용으로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른바 \'창조적 고통,\' 혹은 \'건설적 고통\'의 가능성이지요. 사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의미있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한 때 의롭게 살다가도 순간적으로 교만해지면 그 교만을 깨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고 빨리 깨달아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의 고통은 더욱 더 빛나는 열매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고난 = 변장된 축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지요. 또한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더 큰 위험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치시고 더 큰 교만과 이로 인한 더 큰 형벌을 예방하시기 위하여 일시적인 고통을 주실 수 있다는 말이지요. 고통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아주 세미하게 들리다가도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는 확성기로 듣듯이 더욱 크게 들릴 수 있기에 엘리후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과연 욥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욥은 서막의 1-2장 어느 곳을 읽어봐도 교만하고 악하고 불의해서 고통을 당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선하고 의로웠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에 대한 징벌로서 교만을 깨우치기 위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말은 적어도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의 논리대로 본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는데, 욥이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의인이었지만 앞으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나 악을 범하지 않도록 사전에 경고하기 위하여, 어떤 예방 차원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이 결심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절대 자유가 있으므로, 이 경우 하나님의 정의도 덜 손상되고 욥의 고난이 아주 의미 없는 고난도 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그렇다고 해도 미래에 일어날 악을 막기 위한 교육 예방용으로서는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한계를 넘어섰다는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고통의 신비는 인간이 자기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욥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고난의 신비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