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32/ 엘리후이 세번째 반박

욥기강해32/ 엘리후의 세 번째 반박 :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욥35:1-16



엘리후를 보는 데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눈과 부정적인 눈입니다. 긍정의 눈은 엘리후를 욥과 세 친구들을 훈계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보내주신 메신저라고 봅니다. 불경스러울 정도로 한껏 자기의로 부풀어 오른 욥의 기세를 꺾어 장차 욥 앞에 나타나실 하나님을 좀 더 겸손히 영접하도록 다듬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엘리후가 자기의 발언이 욥이나 친구들과는 달리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있습니다(32: 8; 33: 4 참조). 사실 엘리후는 욥이나 친구들과는 매우 색다른 주장들을 간간이 펼치기에 이러한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아마 욥이나 친구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어린 엘리후의 네 차례에 걸친 논박을 듣고서도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맨 마지막에서 가서 하나님께서 오직 엘리후 한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판단도 내리시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서 욥과 친구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보내신 사자라는 긍정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지는 않을까요?

그러나 부정의 눈도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엘리후가 오만하고 시건방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패기 하나로 선배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게다가 고난의 목적론적 해석 혹은 교육 훈련적 해석이라는 차원을 빼 놓고서는 세 친구들의 입장과 특별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욥은 제쳐놓고서라도 친구들이 엘리후의 발언에 일체 대응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가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하튼 엘리후가 욥기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모종의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것은 3-31장까지 진행된 욥과 친구들의 대화와 앞으로 38-41장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직접 하실 말씀을 32-37장에서 엘리후가 한 말과 일일이 대조해서 어느 쪽이 더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가에 따라서 종합적으로 평가할 문제라고 봅니다.

오늘 말씀은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선악간에 인간의 행실이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와 하나님께 기도해도 왜 응답을 주시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자는 욥의 행위가 하나님의 초연성 혹은 초월적 자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후자는 욥이 악인이기 때문에 울부짖어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식으로 은근히 비난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1.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초월성(35: 1-8)

이제 세 번째 발언에서 엘리후는 욥의 자기의 주장을 물고늘어집니다. 2-3절을 보세요. \"욥 어른은 \'하나님께서도 나를 옳다고 하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지만, 또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짓는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라도 미칩니까? 또 제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얻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시는데,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2절은 번역 상에 논란이 많습니다. 새번역 하단 주에 보면 \'내 의는 하나님의 의보다 더하다.\'라는 또 다른 번역을 소개합니다. 사실 욥이 여러 차례 자기의를 주장한 적이 있지만 자신의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더 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욥이야말로 신성모독 죄를 스스로 범하는 것이 되겠지요! 결국 이렇게 강한 의미로 번역할 경우 엘리후가 욥의 지나친 자기의를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욥의 지나친 자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엘리후는 욥의 또 다른 발언들을 문제삼습니다. 욥은 7: 20절에서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하고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9: 22절에서 \"하나님께서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라고 하나님의 정의에 의문을 던진 적도 있습니다. 또한 엘리후의 입을 통해서 욥이 한 말로 되어 있는 34: 9절에 보면, 욥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해도, 덕 볼 것은 하나도 없다!\"(34: 9)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욥이 상선벌악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한 것을 엘리후가 과장해서 말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대로 갚아주시지 않는다는 불만이 스며있습니다. 즉, 자기처럼 의롭게 사는 사람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마땅한데 세상이 거꾸로인 경우가 많다는 항의이지요. 자기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이 같은 고통을 당하는 마당에 죄를 짓든 말든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 자기에게도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냉소 섞인 한탄이지요. 인생사를 살 때 흔히 경험하는 물음입니다. 선하게 사는 나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재난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악하게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모습을 목도할 때, \"착하게 살아서 뭐하나?\" 이런 냉소와 자조가 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엘리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합니까? 일단 엘리후는 이와 같은 냉소적인 질문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뜬금 없이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왜 구름을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구름은 저 멀리 높이 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초연히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막말로 \"개는 짖어라. 기차는 간다.\"는 식이지요. 이렇게 엘리후는 인간이 하는 선악간의 행위가 인간을 절대적으로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제 6-8절을 보세요. \"비록 욥 어른께서 죄를 지었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가며, 어른의 죄악이 크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미치겠습니까? 또 욥 어른께서 의로운 일을 하셨다고 한들 하나님께 무슨 보탬이 되며, 하나님이 어른에게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욥 어른께서 죄를 지었다고 해도, 어른과 다름없는 사람에게나 손해를 입히며, 욥 어른께서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사람에게나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엘리후의 요점은 단순합니다. 욥의 선행이나 악행, 정의나 불의가 구름이 인간과 아무 상관 없이 저 너머 있듯이 인간사를 까마득하게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으며 겨우 사람들에게나 손익을 줄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엘리바스에게서 나온 상투적인 말이지요. 인간보다 훨씬 더 위대한, 초월적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반대로 아무리 무거운 죄악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하등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말한 이 논리의 약점은 무엇일까요? 물론 약점을 지적하기 전에 엘리후가 이 말을 끄집어 낸 독특한 배경이 중요하겠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엘리후는 욥의 지나친 자기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무죄한 가운데에도 이 고통을 당하니 선하게 사나 악하게 사나 무슨 소용이 있나?\" 하면서 냉소주의 혹은 도덕적 패배주의 혹은 방종주의에 빠진 것을 질타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변호하려고 한 말이지요. 그러나 엘리후의 이 말이야말로 \'begging the question,\' 계속해서 질문이나 구걸하며 헛바퀴나 돌리는 무익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신 동시에 내재적인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뛰어넘어 초연히 계시기도 하거니와 아버지와 자녀처럼 인간과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사귐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물론 인간의 행위에 따라 좌우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인간의 행위를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제한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위를 엄중히 살피십니다. 만일 엘리후가 욥의 지나친 자기의 주장을 꾸짖기 위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할 경우 인간이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지거나 냉소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는지요? 엘리후는 자기가 말한 덫에 스스로 빠지는 자가당착에 직면해 있지 않습니까?

2. 울부짖어도 응답 없는 기도의 이유(35: 9-16)

이상과 같이 욥의 자기의 주장에 하나님의 초월성으로 맞받아 친 엘리후는 이제 악인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악인의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엘리후는 은근히 욥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며 비꼽니다. 9-11절을 보세요. \"사람들은 억압이 심해지면 부르짖고, 세력이 있는 자들이 억누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청하면서 울부짖지만,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두운 때에도, 희망을 주시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승이나 새가 가진 지혜보다 더 나은 지혜를 주시는데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욥이 어려운 일을 만나도 사람에게나 기웃거리지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며 은근히 비난하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엘리후는 욥이 만에 하나 울부짖으며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는 이유도 설명합니다. 12-13절을 보세요. \"그들이 거만하고 악하므로, 하나님께 \'도와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보지도 않으시고,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지도 않으시므로, 그 악한 자들의 울부짖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도해도 메아리만치는, 공허한 기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거만하고 악한 사람들이 울부짖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욥을 겨냥한 말이지요! 욥이 위급한 일을 만나 지혜가 없어 하나님께 울부짖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설령 도와달라며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악인이므로 아무 응답이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악한 자의 기도에 대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침묵은 곧바로 욥의 울부짖음에 하나님께서 입과 귀를 닫고 계신 현실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기도에 대한 엘리후의 말 또한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욥이 처한 상황에 적합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첫째, 욥이 그 실상에 있어서 기도를 안 한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었음에도 응답이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엘리후는 간과했습니다. 둘째, 만일 욥이 기도했더라도 하나님께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다면 이거야말로 욥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는 엘리후의 말도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는 의인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자유도 포함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욥이 처한 극한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초월성과 기도에 대하여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하는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돌팔이 의사(13: 4)에 지나지 않다 할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후의 세 번째 말은 대단히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에 족합니다. 친구들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비슷한 스타일로 떠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가 세 번씩 돌아가며 대동소이한 논리로 자기를 심문하고 정죄했는데 이제 엘리후마저 벌써 세 번째, 친구들과 비슷한 논조로 자기를 공박하니 욥은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것도 욥이 했던 말을 크게 부풀려서 욥을 도덕적 냉소주의자요 방종주의자요 허무주의자로 몰아 부치지를 않나, 아예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악인인 까닭이라고 단정을 하지 않나, 얼마나 괴로울까요? 이렇게 본다면 욥이 엘리후의 말에 일절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엘리후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고의 가치도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적어도 35장의 세 번째 발언에서 드러난 엘리후의 말은 욥의 처절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매우 비정하고 잔혹한 언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옳은 말이라고 해서 다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 엘리후가 내뱉은 말도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욥의 가슴을 더 후벼파는 말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연합 통신이 미국에서 일어난 촌극 한 토막을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병원의 간호사가 이식 수술을 위하여 제거된 아직 살아 있는 심장을 운반하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아직 팔딱팔딱 살아서 숨쉬는 심장이었지만 흠집이 생기자 처벌이 두려운 나머지 쓰레기통에다 버리고서는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간호사의 비리가 발각되어 이 간호사는 250불의 벌금을 물고서 해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간호사에게 부과된 공식적인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inappropriate handling of a human heart,\' 즉 \'사람의 심장을 잘못 간수했음.\'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human heart,\' 즉 \'인간의 마음\'을 잘못 다루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직접 욥 앞에 발현하시기 전에 엘리후가 모종의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내일 36-37장의 네 번째 발언에서 살펴보겠지만 고난의 교육 훈련적 해석은 엘리후만의 공헌이라 말할 수 있기에 분명히 좋은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난 엘리후는 친구들과 진배없이 상처 난 욥의 마음을 아주 부적절하게 다루는 돌팔이 의사였습니다.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