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31/ 엘리후의 두번째 반박

욥기강해31/ 엘리후의 두 번째 반박 : 하나님은 정의롭고 자유로우시니/욥34:1-37


본문은 엘리후가 욥을 향하여 직격탄을 날린 두 번째 발언입니다. 사실 엘리후의 네 차례에 걸친 발언은 욥과 욥의 친구들이 다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양쪽에 다 문제가 있으므로 양쪽 진영의 오류를 교정해주겠다는 의무감으로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에는 욥을 공박하고 또 어떨 때에는 친구들을 비판합니다. 오늘 엘리후의 말은 욥을 비판하다보니 친구들의 주장에 많이 기운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적극 옹호한다는 점에서 친구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인과응보론의 일부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철저히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과응보론의 약점을 비켜 나갑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정의로운 분이라는 사실(34: 11-12)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도덕적 속성을 강조하는 인과응보론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하나님 외부에 있는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간섭과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34: 13-15, 29-30)에서는 인과율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섭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자유를 모순 없이 동시에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1.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엘리후(34: 1-28)

새파랗게 젊은 엘리후가 까마득한 선배인 욥에게 화를 발하며 달려든 결정적인 이유는 욥의 무죄 주장에 있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이 처절한 고통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불경스러워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결백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의로운데 부당한 고통을 당한다는 생각은 결국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욥이 의로운데도 불구하고 불의한 고통을 당한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한 심술궂은 분이시기에 고의로 악과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은 상선벌악의 도덕적 질서가 자리 잡힌 곳이 되어야 하는데 이 마저 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욥이 끈질기게 무죄 주장을 하는 것은 인과응보론이라는 전통 신학을 고수하는 친구들에게 있어서 신성모독이 되고 맙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욥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과오가 있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지요! 사실 욥이 빠진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자기가 저지른 일체의 죄악을 적은 소송장을 어깨에 메고 왕관처럼 쓰고 하나님 앞에 가서 따지겠다고 말합니다(31: 36). 자기의 결백을 변호하고 무죄 판결을 내려주실 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한 분이라는 믿음 때문이지요.

이제 엘리후 역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의 무죄 주장을 질타합니다. \"욥 어른은 이렇게 주장하십니다. \'나는 옳게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나의 옳음을 옳게 여기지 않으신다.\' 또 욥 어른은 \'내가 옳으면서도, 어찌 옳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심하게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나는 죄가 없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욥 어른과 같은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을 물 마시듯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나쁜 일을 하는 자들과 짝을 짓고 악한 자들과 함께 몰려다니면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해도 덕볼 것은 하나도 없다!\' 하고 말합니다\"(34: 5-9). 여기서 엘리후는 두 가지 욥의 행태를 비판합니다. 먼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하나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는 마당에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는 선행을 쌓는다고 할지라도 덕 볼 것이 어디 있느냐는 냉소주의에 빠진 것을 비판합니다.

엘리후가 볼 때 욥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공의를 뿌리 채 뒤흔드는 불경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엘리후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한 사람답게 하나님의 정의를 적극 변호하고 나섭니다. 34: 10-12절을 보세요. \"분별력이 많으신 여러분은 내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악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분께서 옳지 않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이 한 일을 따라서 갚아 주시고, 사람이 걸어온 길에 따라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하시거나, 정의를 그르치는 일을 하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한 일을 하실 수 없으며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사람을 공정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우리 기독교가 신봉하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님의 선성과 정의를 적극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16-28절에서 하나님께서 정의를 집행하시는 사례를 조목조목 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등등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쉽게 폐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18절). 하나님은 당신이 손수 지으신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19절).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 밤중에 목숨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20절). 이렇게 하나님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응징하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며, 그의 발걸음을 낱낱이 지켜 보고 계십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은 없습니다. 흑암 속에도 숨을 곳이 없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곳에도, 숨을 곳은 없습니다\"(34: 21-22). 악인의 필망이라는 친구들의 논리가 여기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지 않습니까? 엘리후의 확고한 신념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악하고 불의한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10절)과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11절)입니다. 결국 엘리후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서 책임을 하나님께 지우는 듯한 인상을 준 욥을 신성모독 죄로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렇게 함으로서 친구들은 엘리후가 자기들과 신학 노선이 같다고 적이 안심할 수도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자유를 변호하는 엘리후(34: 29-37)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뿐만 아니라 엘리후는 하나님의 자유까지 주장합니다. 이 점에서 엘리후는 친구들과 또 다른 입장을 보입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렘 18: 1-8; 롬 9: 21)가 가르쳐 주듯이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이것은 33: 12절에서 이미 주장한 대로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시다.\'는 대전제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사람의 간섭을 받기에 하나님은 너무 크시다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하나님께 땅을 주관하는 전권을 주기라도 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것을 맡기기라도 하였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결심하시고, 생명을 주는 영을 거두어 가시면,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은 일시에 죽어,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34: 13-15). 하나님은 누구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출 3: 1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나는 곧 나,\' 즉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사람이나 세계에 의해서 하등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절대 주권을 갖고 자존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욥이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여기에 영향 받을 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시간적으로도 자유하신 분인데 심판 받을 시간을 미리 정해주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언제 하나님 앞으로 심판을 받으러 가게 되는지, 그 시간을 하나님은 특별히 정해 주지 않으십니다\"(34: 23). 이것은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소송장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소송을 걸려해도 언제 재판을 받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뒤 하나님의 자유와 관련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침묵과 은닉의 자유, 그리고 불의를 허용하시는 자유까지 대담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여, 누가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숨으신다고 하여, 누가 그분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34: 29). 욥이 설령 아무 죄 없이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른 척 입을 닫고 계시거나 숨어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겠느냐는 일갈이지요. 또한 하나님은 악과 불의를 일시적으로 허용하시는 듯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고집 센 민족과 백성을 다스리게 하신들,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34: 30). 물론 백성들을 교육 훈련시킨다는 조건이 붙지만, 하나님은 성군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폭군도 쓰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엘리후가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1-33절을 보세요. \"욥 어른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잘못이 무엇인지를 일러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시면서, 다시는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른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어른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십니까? 물론, 결정은 어른께서 하실 일이고, 내가 할 일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욥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자유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에 자기의 무죄 주장만 하고 있다는 비판이지요. 이렇게 자기의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만 이루어주시기 원하는 뻔뻔스러움이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엘리후의 결론은 37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지은 죄에다가 반역까지 더하였으며,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욥이 스스로 지은 죄\' + \'하나님에 대한 반역(rebellion) 죄\' = \'신성모독 죄\'라는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후는 확실히 친구들과는 다른 논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인과응보론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정의만 외곬으로 붙는데 반해서 하나님의 자유까지 붙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다 붙들면서 욥의 무죄 주장의 뻔뻔스러움을 비판합니다. 엘리후에 의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선하시며 악을 행하실 수 없으며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시는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이것으로 그는 욥이 죄가 있다는 사실을 기정 사실화합니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까닭 없이 욥을 혼내주실리 만무하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세 친구들은 엘리후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함으로서 친구들의 인과응보론도 살짝 빗겨 나갑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과 자유를 가지신 분이기에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주님께서 옳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하고 꾸짖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36: 23). 하나님은 사람의 기대대로 로봇이나 자동 판매기처럼 움직이지 않으시고 물이 필요 없는 곳에 비를 내리실 자유가 있는 분이십니다. 욥의 경우에 만에 하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을 주실 수 있는 자유가 있으므로 왈가왈부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유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욥의 경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부당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까? 도저히 인간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붙드는 것입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있듯이 단지 하나님께서 욥에게 악과 고통을 허락하시고 싶으신 까닭에 욥이 이 아픔을 겪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자유만 붙들 경우에는 하나님이 심술궂고 변덕스러운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에게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을 허용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결국 욥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성과 정의와 하나님의 자유를 다 붙들어야 하는데 이런 해결책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자유의지로 일시적인 악을 허락하실 수 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자유가 정의보다 훨씬 더 큰 것이 되겠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욥에게 무고한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언젠가 반드시 정의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른바 악과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 해석, 혹은 종말론적인 해석입니다. 지금 당장 엄청나게 부당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머지 않은 장래 혹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심판하실 최후의 날에 필연적인 회복과 보상을 받게 된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나 미래에 소망을 걸기에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통을 당할 때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가능성은 욥의 경우처럼 끝없이 항의하는 방법, 아니면 깊은 침묵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겸손의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엘리후가 욥을 비롯한 네 사람에게 자기 발언에 대답해보라고 다그치지만(33: 5, 32; 34: 33; 37: 19), 욥도 친구들도 이상하게 입을 꼭꼭 다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엘리후의 말이 다 옳기 때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이 다 틀렸기 때문에? 대답할 기력이 다 빠져버려서? 더욱이 맨 마지막 장에 가서 욥과 친구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옳다, 그르다\' 판단을 내리셨는데 엘리후만 빠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이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엘리후의 발언을 계속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