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30/ 엘리후 첫번째 반박

욥기강해30/ 엘리후의 첫 번째 반박 :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시니/욥32:1-33:1-33



31장에서 욥이 자기의 무죄를 맹세함으로서 3장에서부터 시작된 지루한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욥에게 남은 마지막 방법은 자기가 했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나서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해명하지 않고서 욥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에게 현현(顯現)하시려는 찰나에 전혀 예상치 못한 제 4의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납니다. 엘리후라는 인물이지요. 엘리후는 욥기에서 거의 유일하게 히브리식 이름을 가진 인물로서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뜻을 가집니다.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에 비해 가장 연소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전에 나타나 욥과 친구들을 향하여 네 차례에 걸친 발언을 합니다(32: 1-33: 33; 34: 1-37; 35: 1-16; 36: 1-37: 24). 여섯 장에 걸친 엘리후의 발언을 후기에 첨가된 것으로 보는 비판적인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막이나 종장에 엘리후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문체가 산만할 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후의 발언은 3-31장까지에 나온 욥의 발언이 지나치게 대담하고 도전적으로 보이기에 이것을 상쇄시키기 위해 후대에 삽입된 대목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보수적입니다. 엘리후의 말이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현재의 욥기 안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코 짧지 않은 엘리후의 말이 욥기 안에, 그것도 욥의 공식적인 발언이 다 끝난 다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28장의 지혜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엘리후는 하나님이 욥 앞에 나타나시기 전에 정지 작업, 혹은 완충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서 보고 싶습니다. 사실 그동안 욥이 주장해 온 자기의에 대한 무죄 주장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죽기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이 냉정해져서 어느 정도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전에 하나님을 대면할 때 마주보는 기차와도 같이 정면 충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욥의 절대 무죄 주장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욥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욥이나 친구들의 친구도 아닌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제 4의 인물, 즉 어느 정도의 거리와 냉정함을 확보한 엘리후를 등장시켜 욥과 친구들의 발언에서 드러난 오류를 교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숨 돌릴 공간을 확보한다는 뜻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엘리후는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해준 것처럼 하나님의 현현을 예비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엘리후의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32-37장에 나타난 엘리후의 말을 분석해보면 친구들이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농후하고, 또한 젊은 사람으로서 오만 방자하게 보일 정도로 훈계 일변도여서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엘리후의 개입을 볼 경우, 제럴드 젠첸(Gerald Janzen)이 지적하듯이 마치 창 3장의 타락 이야기에서처럼 엘리후는 뱀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기가 던진 말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사이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판단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과의 대면을 앞둔 욥이 장차 하나님이 하실 말씀과 그 이전에 엘리후가 하는 말 사이에 어떤 것이 참인지 판단하도록, 어떤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기 위하여 엘리후의 말이 소개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요.

1. 엘리후가 논쟁에 끼어 든 이유(32: 1-22)

엘리후가 욥과 세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을 지켜봤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32: 2절을 보면 엘리후는 이 광경을 옆에 서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왜 3차에 걸친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일체 함구하다가 욥의 최종 발언이 끝난 다음에서야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산문으로 된 1-5절에 있습니다.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 두었다.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엘리후는 람 족속에 속하는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이다. 엘리후는 또 욥의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냈다.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하는 말에 변변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서 엘리후가 가장 젊은 사람이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이 모두 욥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화가 났다.\"

여기에 보면 엘리후가 쥐 죽은 듯 있다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며 발언을 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자신이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어른들이 하는 일을 그냥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장유유서를 따지는 우리 사회나 유대 사회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일이지요. 둘째로, 욥이 줄기차게 자기의를 주장함으로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후가 격분하며 발언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욥의 끈질긴 무죄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로, 친구들이 시종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욥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끌려 다니는 모습에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주장은 이제 친구들의 지혜가 다 바닥이 났으니 뒤로 물러서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엘리후의 등장은 양비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욥도 틀렸고 친구들도 다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제 새까만 후배인 자기의 지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고 주문합니다.

32장에 나타난 엘리후의 모습은 젊은이라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유들유들한 모습을 보입니다. 적당히 어를 줄도 알고 날카로운 직격탄도 날릴 줄 아는, 노련한 화법을 구사합니다. 6-10절을 보세요. 여기서 엘리후는 자기가 까마득한 후배인 까닭에 연세 많으신 네 분들의 지혜를 그냥 경청할까 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자기가 끼어 들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저절로 지혜도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지요(32: 9). 생물학적인 나이와 정신적인 나이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지혜가 다 바닥이 나서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는 선배님들은 이제 좀 뒤로 물러나시고 후배인 자기에게 발언권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표현할 때, 엘리후는 만일 자기가 말을 하지 않으면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가 터지듯이 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허풍을 떨기도 합니다(32: 19). 그리고 자기는 이 논쟁에서 누구 편을 들 생각도 없고 누구 듣기 좋은 아첨을 할 의향도 없는 아주 공평한 중재자가 되겠다고 너스레까지 떱니다(32: 21-22). 보통 능구렁이가 아닙니다!

자, 그러면서 엘리후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사람에게 슬기를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 곧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32: 8).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지식이나 객관적인 관찰에 입각해서 말을 하지만 자기는 하나님의 영, 즉 계시를 직접 받아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발언이 친구들의 발언보다 더 지혜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자신의 지혜가 영감을 받아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32: 11-14). 이것은 33: 4절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데 엘리후가 자신의 발언이 욥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는 결정적 근거가 됩니다. 이와 같이 엘리후는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즉 욥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자기가 직접 대언해서 욥으로 하여금 해답을 얻도록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 나서겠다, 참 대담한 젊은이지요!

2.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걸어오시는 하나님(33: 1-33)

32장이 엘리후가 이 논쟁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밝힌 말씀이라면 첫 번째 논박은 33장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욥을 비판하는 제일 큰 잘못은 욥의 결백성에 대한 주장입니다.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결백하다. 내게는 허물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내게서 흠 잡을 것을 찾으시며, 나를 원수로 여기신다. 하나님이 내 발에 차꼬를 채우시고,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욥 어른께 감히 말합니다. 어른은 잘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어른께서는,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대드시는 겁니까? 어른께서 하시는 모든 불평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까?\"(33: 8-13). 엘리후는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했던 말들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크신 분인데(33: 12), 어떻게 감히 그 위대하신 분 앞에서 자기의를 주장할 수 있느냐고 힐문합니다.

이제 엘리후의 발언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친 논쟁이 난항을 거듭한 이유는 감히 사람과 비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고통의 기원과 이유만 따졌기 때문인데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과거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고통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는 미래로 선회하라는 충고이지요. 이와 같은 엘리후의 입장은 친구들이 물고늘어졌던 인과응보론과는 매우 색다른 엘리후만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기에 주목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실 수 있는데 고통도 그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서 엘리후는 사람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 걸어오시는 두 가지 사례를 듭니다. 먼저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꿈을 꿀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게 하셔서 여러 가지 경고도 주시고 죄짓지 않게도 하시며 교만하지 않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33: 15-18). 우리도 영몽을 통하여 이런 체험을 실제로 하기 때문에 이 말은 참말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질병과 질병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수많은 병자들이 바로 그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영혼과 육신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또한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결사적으로 기도해서 회복된 것처럼(왕하 20: 1-11; 사 38: 1-8), 병과 치유가 하나님의 계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질병을 보내셔서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해서라도, 잘못을 고쳐 주기도 하십니다\"(33: 19).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입맛도 잃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사경을 넘나들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질병을 통하여 사람과 교섭하시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의 치유를 통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먼저 천사 하나를 파견하여서 병을 고쳐주시는데 환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듣지 않으면 낫지 않습니다(33: 23-24). 천사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요. 병에 걸릴 때 하나님께서 천사의 음성을 통하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을 들으면 병이 낫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를 통하여 병이 낫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어서, 옳은 일을 그르쳤으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구원해 주셨기에, 이렇게 살아서 빛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33: 26-28). 기도해서 병이 나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고스란히 실려 있지요. 중요한 것은 질병에서의 회복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똑같은 사람에게 두 번, 세 번 이런 일을 되풀이하신다는 것입니다(33: 29). 질병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시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두 번 세 번,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질병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나님 하신 일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구제불능이지요!

이제 엘리후의 요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질병과 고통은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도록 이끄시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고통에 대한 교육 훈련용 해석, 혹은 섭리 목적론적 해석이, 물론 친구들의 발언 속에 간간이 내포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엘리후의 발언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공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욥이 현재 당하는 고통은 결코 불행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더욱 더 환한 생명의 빛(33: 30)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하나님의 계시를 수반할 수 있다는 엘리후의 생각은 욥의 친구들과 달리 고통에 대한 미래지향적이고 더욱 더 긍정적인 해석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서 고무적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후는 등장 인물들 가운데 최연소자로 보기에는 너무도 의뭉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에 구렁이가 몇 마리가 들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네 사람의 선배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교훈조로 슬슬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이렇게 능청맞고 다소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친구가 과연 욥에게 어떤 결정적 해답을 제시할지 초장부터 의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동안 크게 의식하지 못했던 차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바로 고난에 대한 교육 훈련적 혹은 목적론적 해석이지요. 하나님은 좋은 일만 통하여 역사하지 않으시고 나쁜 일을 통해서도 계시한다는 말씀입니다. 수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그 대표적인 예로 꿈과 질병을 들었지만, 고통을 통해서도 인간과 교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더욱 더 성숙한 인격자로서의 연단이라는 차원에서의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고통을 받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는데 의외로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창조적 고통\' 혹은 \'건설적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가 이른바 \'고난받는 종\'(사 52-55장)의 개념을 통하여 고난이 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연단 시키기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도 나면서 소경된 사람이 자기 죄나 조상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요 9: 1-12), 이러한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제 과거에 집착해 고통의 원인과 출처만 캐는 것보다는 미래를 보면서 고통 속에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서 친구들이 물고늘어진 인과응보론의 약점도 비켜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의미 없는 고난, 하나님의 목적이나 섭리를 묻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자기가 저지른 악과 무관한 고난까지도 이런 렌즈를 통해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욥기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는데 문제는 계속됩니다.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