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9/ 욥의 독백 (IV)

욥기강해29/ 욥의 독백(IV ): 여태까지 나는 악한 짓을 하지 않았으니/욥31:1-40


본문 말씀에서 욥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최종적인 무죄 맹세를 합니다. 자기의 양심을 걸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순전함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도 수 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 변증했지만 31장의 맹세는 그동안의 변증을 총 집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9장에서 기억된 욥의 과거 행복과 30장에서 진술한 현재의 고통이 서로 뒤범벅이 된 채 31장의 무죄 맹세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의 욥의 결백성에 대한 주장은 매우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성격을 띱니다.

1. 욥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죄악들(31: 1-34; 38-40)

본문에서 욥은 \"\'만일\'(if)∼\'그리했더라면\'(then)\"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기가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14가지의 죄악들을 열거합니다. 만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면 어떤 형벌도 달게 받으리라는 식으로 그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겠다는 표시입니다. 사실 맹세라고 하는 것이 거짓이나 위증이 있을 경우 자신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저주나 징벌도 감수하겠다는 양심 선언이기 때문에, 욥은 자신의 양심으로 이루어진 심판대 위에 서서 자기의 죄악들을 하나하나 철저히 계산해보겠다는 각오이지요. 14가지 죄악 리스트와 관련해서는, 히브리인들이 맹세를 선언할 때 대개 숫자 7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7의 배수인 14는 욥의 양심이 허락하는 모든 죄악들을 남김없이 심문해보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욥의 맹세에서 나타난 죄악들은 어떤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과의 사회 윤리적인 관계에서의 구체적인 죄악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자신이 어떤 죄악들로부터 자유롭다고 맹세할까요? 놀랍게도 욥이 언급한 대부분의 죄악들은 여성이나 노예, 고아와 과부, 나그네, 소작농, 등의 사회적 약자들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욥은 젊은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안목의 정욕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절).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욥이 하는 일을 낱낱이 알고 계시며 모든 발걸음 하나하나 다 세고 계시는데(4절), 자기가 감히 어떻게 젊은 여성들이나 유혹하고 다니겠냐고 반문합니다. 둘째로, 욥은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고 항상 정직하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5-6절). 만일 자기가 조금이라도 죄를 지은 흔적이 있으면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거두어 먹거나 자기가 지은 농사가 쫄딱 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7-8절). 셋째로, 욥은 남의 아내를 탐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9절). 십계명 중에 제 7계명이 간음에 대한 것인데(출 20: 14) 간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지요. 만일 자기가 이웃의 아내를 탐낸 적이 있다면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노예가 되거나 그 아내가 되더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말합니다(10절). 넷째로, 자기의 남종이나 여종을 공평무사하고 평등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13절). 그 이유로 욥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5절). 참 놀라운 말씀이지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만인평등론이 욥기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만일 자기 종들을 함부로 대했더라면 하나님 앞에 뵐 낯이 없으며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14절). 종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자기와 똑같이 그 종을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잠 14: 31 참조)! 다섯째로, 욥은 자선 행위를 회피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16절). 고아나 과부와 같이 가난한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기꺼이 응했다는 것이지요(17-18절). 여섯째로, 가난해서 옷도 걸치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19-20절). 일곱째로, 재판에서 고아와 같은 약자를 이기기 위하여 속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21절).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23절).

여덟째로, 욥은 황금이나 정금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산에 대해서도 자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24-25절). 거부 중에 거부였지만(1: 3), 배금주의에 빠져 자기 재산이 신이 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아홉째로, 일월성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6-27절). 십계명 중에 두 번째 계명이 우상 숭배를 금한 계명인데(출 20: 4-5), 우상을 섬긴 적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어떤 미신적인 자연 숭배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욥의 순전한 믿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욥은 만일 해와 달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것에 절을 하거나 경배의 표시로 자기 손에 입을 맞춘 적이라도 있다면 높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28절). 열째로, 원수가 고통받을 때 기뻐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29-30절). 예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는데(마 5: 43), 욥도 원수 사랑을 이미 실천했다는 것이지요. 열한 번째로, 나그네 영접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31-32절). 나그네에게 기꺼이 자기 집을 개방했다는 것이지요. 열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은 자기 죄를 감추려 들지만 욥은 자기 허물을 솔직히 드러냈다는 것입니다(33절). 그리하여 자기 허물이 폭로될 때 이웃이 자기를 헐뜯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34절). 열세 번째로, 타인 소유의 땅을 부당하게 빼앗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38절). 개역 성경은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열 네 번째로, 욥은 땅에서 나는 소산을 거저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 기른 농부를 굶겨 죽인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39절). 만에 하나 자기가 열 세 번째와 열 네 번째의 죄악을 저지른 적이 있다면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보리 대신 잡초가 나더라도 유구무언이라고 말합니다(40절). 마지막 두 가지 악은 땅과 땅을 가꾸는 이들에 관한 생태학적인 정의의 문제인데 이 부분에도 욥은 떳떳하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14가지 죄악들의 리스트를 보면 매우 구체적이고 사회 윤리적인 성격을 가진 것들입니다.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 했던 것\'(1: 1)은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이웃과의 매우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관계, 특히 여성, 노예, 고아와 과부, 나그네, 소작농, 등으로 대변되는 약자들과의 관계에서 그러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욥이 투명하고 결백하다면 이웃과의 관계, 특히 그 당시 엄격한 신분 질서 사회 속에서 가장 홀대받기 쉽고 취약했던 빈자와 약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욥이 외치는 정의는 성차별주의와 황금만능주의 배격, 사회 정의와 인권 평등, 우상숭배 철폐, 임금 정의, 등등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확증된 정의였습니다.

2. 욥의 맹세에 대한 자신의 서명(31: 35-37)

자기의 결백성에 대하여 조목조목 변호를 한 뒤 욥은 자기 양심의 이름으로 서명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계약서에 우리 이름을 서명 날인할 때 모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듯이, 지금까지의 욥의 무죄에 대한 맹세가 하나도 어김없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35-37절을 보세요. \"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내 원수가 나를 고발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록한 소송장이라도 있어서, 내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아, 얼마나 당당한 태도인지요! 35절 말씀 중에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의 부분을 개역 성경은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로 번역했습니다. 더 좋은 번역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맹세문을 다 기록한 뒤 서명을 해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은 한 점 오류도 없습니다.\"라고 떳떳이 외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욥은 혹시라도 자기의 죄악을 기록한 소송장이 있다면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고 말합니다. 자기 죄에 관한 한 그 어떤 소송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아, 얼마나 결백에 대한 확신이 강했으면 이렇게 까지 당당할까요? 이제 욥에게 친구의 말들은 아무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엘리후라는 젊은이의 발언이 아직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과 욥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욥의 부당한 고난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사람의 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잃어버렸던 왕관을 되쓰고 마침내 하나님을 대면할 채비를 갖춥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떳떳이 설 준비를 합니다. 흥미롭게도 31장 맨 마지막 절은 \"이것으로 욥의 말이 모두 끝났다.\"라고 선언합니다. 욥이 할 수 있는 말은 다 한 셈입니다. 이제 공은 욥의 손에서 하나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31장을 읽으면서 또 다시 깜짝 놀라는 것은 사회 윤리성입니다. 욥이 결백을 주장한 악행 리스트를 보면 거의 다가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 되기 쉬운 소외된 자들, 약자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불란서 혁명과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명시한 인권 평등이 이미 욥기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도 참 놀랍습니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인간 평등의 정신이 창조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합니다. 주인이나 종이나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동일한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창조 신앙, 여기에 만인평등의 정신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기독교 신앙은 아주 일찍부터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합니다.

또 하나, 욥이 열거한 자비와 정의의 실천 행위는 예수님께서 마태 25: 31-46절에서 하신 말씀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가 목 마를 때 마실 것 주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해주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봐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줄 때,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약 2: 17).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소아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린이들의 심리를 치료하는 한 정신과 의사가 자기 집에 새로운 차도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시간 최선을 다해 수고한 나머지 드디어 콘크리트를 편편하게 처서 완벽한 수준의 드라이브웨이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이 집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새로 만들어 놓은 시멘트를 밟아서 그만 깊은 발자국을 남겨 놓았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들을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아내가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할 아동 정신과 의사예요. 그런 당신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화를 내시면 어떡해요.\" 부인의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남편이 \"나는 아이들을 추상적으로 사랑하지 구체적으로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과 정의도 입에서만 맴돌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약 2: 16).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