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28/ 욥의 독백(III) : 하나님이 나를 진흙 속에 던지시니/욥30:1-31 욥기에서 자주 발견하는 패턴 중에 하나는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욥은 현재의 고난이 너무 참기 어려워 미래의 구속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들뜹니다. 그러다가 다시 냉엄한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이 처절한 고통과 소외만 있습니다. 29장에서 욥은 지난날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어들었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그 옛날 군왕과 같이 최고의 존영을 한 몸에 누렸던 시절을 돌아보니 적지 않게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30장에서 욥은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옵니다. 찬란했던 과거와 참담한 현재를 대조해보니 지금 욥은 너무도 쓸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비통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현재의 고통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제 읽었던 29장의 영화로웠던 옛날과 30장에 묘사된 오늘의 처참한 상황은 세 차례씩이나 나타나는 \'이제는\'(1, 9, 16절)이라는 말에 의해서 더욱 생생하게 대조가 됩니다. 1. 부랑자들에게까지 천대받는 욥의 신세(30: 1-15) 인도에 가면 4종성 계급, 즉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 계급으로서 \'불가촉 천민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접촉하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불가촉 천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사람과 짐승의 중간쯤 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들과는 그림자만 스쳐도 오염된다고 생각해서 일체 일반인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남의 논밭에서 날품을 팔거나 분뇨수거, 도살, 동물 시체 치우는 일, 등 매일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이들은 마을이나 사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기들만의 폐쇄된 주거 구역을 갖고 있는데 학교나 병원이 없을 뿐 아니라 수도 시설과 화장실도 열악하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에는 약 3억 정도의 불가촉 천민들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30: 1-8절 말씀을 보면 불가촉 천민들을 연상시키는 비류(匪類)들이 등장합니다. 욥이 이들을 직접 거명하는 이유는 한 때 왕과 같이 존영을 한 몸에 누리던 자기가 이런 밑바닥 사람들, 그것도 그들의 어린 자식들로부터 철저히 조롱받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욥을 깔보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의 특징은 \'쓸모 없으며,\' \'사람 축에도 끼이지 못하고,\'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1절에 보면 이들은 욥의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도무지 쓸모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가난에 찌들려 몰골이 흉하며 풀뿌리와 쓴 나물로 간신히 연명해 가는 자들입니다(3-4절). 이들은 도둑질과 약탈만 일삼다가 마을에서 쫓겨나 침침한 골짜기나 땅굴, 동굴에서 짐승처럼 유랑하는 자들입니다(5-7절). 이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분별력도 기대하기 어려운 자들입니다(8절). 한 마디로 이들은 동네에서 추방되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OUTCASTS, 구제 불능자들이지요! 29: 16절에 보면 그 옛날 욥은 궁핍한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보살펴보고 처리해주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들 부랑자들은 욥이 베풀 수 있는 자선과 정의 밖에 있는, 즉 불가촉 천민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욥도 자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가 정해놓은 질서를 깨뜨리면서까지 무제약적으로 자비와 정의를 실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자, 이제 문제는 이렇게 비열하고 천박한 인간 이하의 무리들, 그것도 그 자식들이 욥을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욥의 위상이 그 당시 최하층 천민 수준보도다 못한 밑바닥까지 추락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불가촉 천민들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굴러 떨어졌다는 뜻이지요. 9-15절을 보면, 그 어떤 종교 윤리적 분별력도 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이와 같은 비류들, 부랑아들, 유랑자들까지 욥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이제는 돌아와서 나를 비웃는다. 내가 그들의 말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나를 꺼려 멀리하며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슴지 않고 침을 뱉는다\"(9-10절). \"이 천한 무리들이 내 오른쪽에서 나와 겨루려고 들고 일어나며, 나를 잡으려고 내가 걷는 길에 덫을 놓고, 나를 파멸시키려고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 그들은, 내가 도망 가는 길마저 막아 버렸다. 그들이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데도, 그들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들이 성벽을 뚫고, 그 뚫린 틈으로 물밀듯 들어와서, 성난 파도처럼 내게 달려드니\"(12-14절). 한 마디로 말해서 되는 대로 막 굴러 먹고사는 이 비류들이 마음껏 희롱하고 천대할 수 있는 대상이 욥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욥이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원수들 앞에서 멸시 천대를 받으신 장면이 연상되지요! 자, 이제 15절을 보세요. \"나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내 위엄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구원의 희망은 뜬구름이 사라지듯 없어졌다.\" 가장 높은 자보다도 더 높았던, 왕 중에 왕과 같이 존엄으로 가득 찼던 욥이 가장 낮은 자보다도 더 낮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는 것이지요! 왕중왕 예수님이 십자가의 중죄인으로 당하신 능욕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2. 욥을 진흙이나 쓰레기만도 못하게 만드신 하나님(30: 16-31) 16-23절에서 욥은 초점을 사회적 고립과 멸시에서부터 하나님께로 전환시킵니다. 한 때 욥을 지켜주셔서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모진 고통까지도 동시에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나를 진흙 속에 던지시니, 내가 진흙이나 쓰레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욥기를 통틀어 \'진흙\'이라는 말은 약 24회 정도, \'쓰레기\' 혹은 \'재\'라는 표현은 드문드문 나타나는데 전자는 창조시의 하찮음, 후자는 죽음의 허무함을 각각 상징합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곤궁함을 상징하는 말들이지요. 한 때 그 엄청난 재산과 다복한 자식들을 주셨고 왕처럼 분에 넘치는 존영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욥의 인생을 진창에 빠지게 해서 산산조각을 내셨다는 것입니다. 죽을 지경에까지 내몰아서 밤마다 뼈를 깎는 아픔이 떠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욥은 하나님이 축복의 수여자이실뿐 아니라 고통의 궁극적 원인자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1: 21)이시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수렁 속에 빠진 욥은 또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지만 하나님은 침묵만 지키십니다(20절). 땅에서는 고통과 천대가 하늘에서는 막막한 침묵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또 다시 탄식하며 절규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너무 잔인하십니다. 힘이 세신 주님께서, 힘이 없는 나를 핍박하십니다. 나를 들어올려서 바람에 날리게 하시며, 태풍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끝내 나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만나는 그 죽음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 몸을 치십니까? 기껏 하나님의 자비나 빌어야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 몸을, 어찌하여 그렇게 세게 치십니까?\"(21-24절). 자, 이제 흥미로운 것은 25-31절에서 욥은 자기가 이웃에게 베풀었던 행위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비교합니다. 25절을 보세요. \"고난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다. 궁핍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함께 마음 아파하였다.\" 이미 29장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욥은 가난한 사람들, 의지할 데 없는 고아들, 과부들과 동고동락했습니다(29: 12-16). 이러한 선행에 당연히 선으로 보상을 받아야 할텐데 정반대로 악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가 들이닥쳤구나. 빛을 바랐더니 어둠이 밀어닥쳤다. 근심과 고통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햇빛도 비치지 않는 그늘진 곳으로만 침울하게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면 도와 달라고 애걸이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26-28절). 그 옛날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욥의 미소를 통하여 용기와 희망을 회복하지 않았습니까?(29: 24). 그러나 이제 욥이 빛을 기대했을 때 거꾸로 어둠이 밀어닥쳤습니다. 욥이 성문 회관에 나가면 사람들이 욥을 환영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을 단비를 기다리듯이 학수고대하지 않았습니까?(29: 7; 29: 23). 그러나 이제 욥은 어두 침침한 곳만 피해서 떠돌아다니는 신세요, 사람들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애걸복걸하는 신세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28절). 그리하여 욥은 고통에 겨워 신음하듯이 울부짖는 이리의 형제처럼, 애처롭게 울어대는 타조의 친구처럼 되어서 자기가 자기 목소리를 들어봐도 구슬프고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29절). 비통하고 애달픈 고독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단비를 몰고 다녔던 화사한 시절은 가고 살갗이 햇빛에 검게 타서 벗겨지고 뼈는 열을 받아서 다 녹아버렸습니다(30절). 욥은 한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었는데(29: 25), 지금 수금 소리는 통곡으로 바뀌었고, 피리 소리는 애곡으로 변했습니다(31절).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 더니 이렇게 상황이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왕에서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아름다웠던 옛 시절을 추억해본 뒤 현재의 고통을 돌아보니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습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30장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 생각이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욥이 그리스도 예수의 예표(豫表)라는 말은 확실히 옳습니다. \'왕같이 행복했고 존엄했던 옛날\'→\'견디기 어려운, 부당한 고통과 수치\'→\'회복과 갑절의 축복,\' 이런 도식이 욥과 예수님의 생애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까? 욥의 인생이 지금 행복에서 고통으로 역전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욥의 결말을 미리 알기에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전한 믿음을 지킨 욥에게 더욱 큰 은총과 축복으로 또 다시 역전시켜 주실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도 뒤이어 찾아올 부활의 영광을 미리 알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이 고난으로 역전되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십시오. 또 다른 역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인한 인생 역전극을 생각하니 이런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한 구두 수선공이 구두를 만들려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작은 송곳이 그 당시 9살 먹은 아들의 눈에 떨어져 박혔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이 아이는 두 눈을 모두 잃고 장님이 되어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맹인학교에서 이 아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점자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 조각에다 크게 글자를 파 새겨 놓은 것을 손으로 더듬음으로서 글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구두수선공의 아들은 점점 자라나면서 시각장애인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더 좋고 새로운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를 궁리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새로운 점자책을 만들어냈는데 종이에다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글자를 새겨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점자책을 발명한 사람은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라는 불란서 사람으로서 자기 눈에 떨어져 두 눈을 빼앗아 갔던 바로 그 원수 같은 송곳으로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준 점자책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자책을 영어로 \'Braille Book\'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송곳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송곳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브라유의 눈을 상하게 했던 그 송곳이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지 않았습니까? \'성한 눈\'→\'송곳으로 인한 실명\'→\'그 송곳으로 점자책 발명\'→\'시작 장애인에게 희망 안겨줌\', 이런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도식이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습니까? 욥의 고난 속에서도 이와 같은 회복의 소망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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