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7/ 욥의 독백/ (II)


욥기강해27/욥의 독백(II): 아, 행복했던 옛날이여!/욥29:1-25


29-31장은 욥의 독백입니다. 3장에서 독백으로 세 친구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면 여기에서의 독백으로 세 친구들과의 논쟁은 완전히 끝납니다. 그런데 3장과는 뚜렷이 대조가 됩니다. 그 때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고, 차라리 죽기를 갈망해 스올에서 안식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참담한 고통의 현실에 대해서 여과되지 않은 탄식과 울부짖음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때 그는 재산과 자식과 자기 건강까지 잃은 참담한 고통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논조가 매우 반항적이고 전투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 바퀴 논쟁이 다 끝난 뒤 29-31장에 오면 그 톤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깊은 고뇌와 성찰과 대화를 통하여 한결 정화되고 절제된 감정이 역력합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감정이 상당히 누그러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은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해서 부당한 고통을 승인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9장에서 욥은 고통을 당하기 이전의 행복했던 시절, 이웃에게 정의와 선익을 베풀었던 옛날을 아름다운 필치로 회상합니다. 그리고 30장에 가서는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언급함으로서 그 때의 행복과 대비시킵니다. 그러다가 31장에 가서 다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이것을 \'왕족 의식\'과 \'노예 의식\'이라는 정반대의 렌즈를 통해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29장-욥이 과거에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았을 때에는 왕과 같았습니다(29: 5); 30장-하나님께서 욥이 누리던 왕과 같은 존영을 다 빼앗아 가셔서 진흙이나 쓰레기처럼, 즉 노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30: 19); 31장-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여전히 왕족 의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31: 35-37).

이제 이와 같은 욥의 최후의 독백에서 28장의 지혜 이야기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세 신학자 친구들과의 논쟁이 아무 소득 없이 끝나자 갑자기 지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했습니다. 지혜의 부재로 3라운드에 걸친 논쟁이 결렬되었다면, 지혜는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이 우주 자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금은보화로 사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 무상의 선물로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경외\'와 \'악을 멀리 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의 양축임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지혜는 욥의 지금까지의 삶을 요약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28장에서 지혜 이야기를 통해 잠시 호흡을 고른 욥은 행복으로 충만했던 옛날을 조용히 관조합니다. 그랬더니 욥의 과거는 지혜로운 삶 그 자체였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악을 멀리하며 윤리 정의를 실천하는 지혜로 충만한 삶이었습니다. 이제 29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예리하기 짝이 없는 욥의 사회 윤리의식입니다. 욥은 아마도 엘리바스의 마지막 공격, 즉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 대하여 욥이 수탈과 착취를 일삼았다는 비난(22: 5-11)을 매우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과거에 자기가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소외자들을 어떻게 사랑과 정의로 돌봤는지 담담한 필치로 회고하고 있습니다.

1. 욥의 행복했던 옛날에 대한 향수(29: 2-11)

여기에서 욥은 두 가지 차원에서의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누렸던 개인적인 차원의 행복입니다. 그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과 함께 하셨으므로 욥은 자녀들과 함께 있었고 젖소와 양들이 얼마나 젖을 많이 내는지 발이 그 젖으로 흥건히 젖을 정도였고 올리브 기름도 강물처럼 흘러나왔습니다(2-6절). 둘째로, 욥이 공동체 안에서 누리던 명성과 존경, 즉 사회적인 차원의 축복입니다. \"그 때에는 내가 성문 회관에 나가거나,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젊은이들은 나를 보고 비켜 서고, 노인들은 일어나서 내게 인사하였건만. 원로들도 하던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귀족들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나 한 것처럼 말소리를 죽였건만. 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칭찬하고,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내가 한일을 기꺼이 자랑하고 다녔다\"(7-11절). 모든 입과 귀가 욥에게 쏠릴 만큼 욥이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2. 이웃에게 베풀었던 욥의 은덕과 정의 실천(29: 12-17)

거듭 말씀드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욥에게 주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른바 날카로운 사회 윤리의식입니다. 욥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이 이웃과의 관계,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결백은 개인적인 차원이나 어떤 추상적인 영역에서가 아닌,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결정될 문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자신이 그 옛날 고와와 과부로 대변되는 약자층에 어떤 자비와 정의를 베풀었는가를 회상합니다. \"내게 도움을 청한 가난한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구해 주었는지,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를 내가 어떻게 잘 보살펴 주었는지를 자랑하고 다녔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내가 베푼 자선을 기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과부의 마음도 즐겁게 해주었다.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12-17절).

여기서 욥은 단지 고와와 과부로 대변되는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높은 정의감을 가지고 그들을 불의한 압제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건져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장애우들의 인권까지도 지켜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현재의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과거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억압하고 수탈했기 때문이라는 엘리바스의 비난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와 같은 욥의 약자에 대한 자선과 정의 실천 내용을 동네 사람들은 하나 같이 칭찬하고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지요(11절 참고).

3. 왕 같았던 날들에 대한 향수(29: 18-25)

18-20절에서 욥은 힘없고 불행한 이웃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고 정의를 실천하는 일을 계속할 것임을 다짐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욥의 인생은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같이, 이슬 머금은 나무같이 풍요로워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덕행을 칭송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기 때문이지요(18-20절).

이제 21-25절에서 욥은 다시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정신적 지주요 왕 같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회상합니다. 여기서는 욥이 주로 언론 중재인으로서 지혜로운 조언과 높은 감화력을 끼쳤다는 사실을 되뇝니다.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내 말을 듣고, 내 의견을 들으려고 잠잠히 기다렸다. 내가 말을 마치면 다시 뒷말이 없고, 내 말은 그들 위에 이슬처럼 젖어들었다. 사람들은 내 말을 기다리기를 단비를 기다리듯 하고, 농부가 봄비를 기뻐하듯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새로운 확신을 얻고,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나는 마치 군대를 거느린 왕처럼,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사람처럼,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이 갈 길을 정해 주곤 하였건만\"(21-25절).

거의 나르시시즘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자신이 누렸던 존영을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욥은 지혜로운 조언자요 청취자로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든 사람의 기쁨과 용기와 소망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그들에게 한 사람의 왕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시 72편의 \'왕을 위한 기도문\'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욥은 그 백성을 정의로 판결하고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하는 왕이었습니다(시 72: 2). 그의 통치가 백성에게 풀밭에 내리는 비처럼, 땅에 떨어지는 단비 같은 왕이었습니다(시 72: 6). 그는 가난한 백성과 불쌍한 백성을 도와주고 건져주는 자비와 정의의 왕이었습니다(시 72: 12-14). 한 마디로 말해서 욥은 단순히 자비와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슬픈 사람을 위로하는 대자대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렇게 왕과 같이 존귀와 영광을 한 몸에 받던 스타 중에 스타가 어떻게 형편없이 추락해서 상황이 180도 역전되었는지, 내일 새벽에 30장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기를 읽을수록 도전 받게 되는 것은 욥의 날카로운 사회 의식입니다. 저는 욥기를 깊이 읽기 전에 욥기가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전히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욥이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춘 책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욥기는 대단히 사회주의적인 책이요, 해방 신학의 아버지 구스따보 구띠에레스가 예리하게 갈파하듯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해방의 영성을 품고 있는 책입니다. 욥은 단지 자기 홀로 고난받는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자기처럼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이름 없는 다수를 생각합니다. 이른바 고통의 연대의식,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자기의 무죄는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개인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대 사회적인 입장에서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에 대한 무죄여야 한다는 확신을 굳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욥은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비인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에 조금도 관여한 일이 없었으며, 정반대로 그들을 보호하고 억압의 사슬에서 풀어내는데 앞장섰다는 사실을 누누이 증언합니다. 심지어 그는 그 당시 가장 소외되기 쉬웠던 장애우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으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생태학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도 앞장섰다고 주장합니다(31: 38-40 참조).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지금 제법 큰교회 목사로서 옛날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가진 자, 배부른 자의 입장에서 없는 자,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아픔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누구 말대로 진정한 영성은 배고픈 창자에서부터 온다고 했는데 혹시라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비만증에 걸려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런 점에서 1991년에 나온 「의사」라는 영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 허트는 아주 교만하고 냉담하기 짝이 없는 심장외과 의사 역으로 나옵니다. 이 의사는 마치 무엇인가 막혀 있어서 뚫어야 하는 부엌의 싱크대처럼 그저 기계적으로 무관심하게 자기 환자들을 대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인 자기가 식도암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서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습니다. 이제 치료하던 의사에서 치료받는 환자로 입장이 역전되고 보니 과거에 자기가 환자들을 기계 다루듯이 무관심하게 대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막상 환자가 되어 치료를 받아 보니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단지 환자의 신체만 기계적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 그의 영혼까지 사랑으로 어루만져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제가 바로 이 허트와 같은 의사가 아니었는지 반성합니다.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교인들을 같은 크기의 아픔으로 어루만져 주지 못하고 그저 상투적인 위로와 형식적인 기도를 해주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보는 것입니다.



[경배 찬양] 예수 사랑
  • 글쓴이:두나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