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5/ 세친구들에 대한 욥의 마지막 응답


욥기강해25/ 세 친구들에 대한 욥의 마지막 응답/욥27:1-23


이제 27장으로 지루했던 3라운드의 논쟁이 실질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친구들의 말은 엎칠락 뒤칠락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이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친구들이 해야 할 말을 욥이 풍자적으로 대신 해주어야 할 만큼 바닥이 난 것이지요. 본문은 세 차례에 걸친 논쟁을 종합해서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한 욥의 대답이라고 보면 됩니다. 욥의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는 죽기까지 자신의 결백을 굽히지 않겠다는 맹세와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들이 대가를 치르고야 말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문제는 27: 13-23절입니다. 이 부분을 소발의 말로 단정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른바 악인의 필망이라는 이 주제가 소발이 20장에서 피력했던 악인의 최후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 악인이 반드시 망하고야 만다는 주장은 빌닷도 끈질기게 물고늘어진 단골 메뉴이기 때문에(18장) 인과응보론을 고수하는 친구들 모두의 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성경에 있는 원문 그대로 욥의 입에서 나온 말로 보자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설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욥이 소발이 할 말, 혹은 이미 했던 말을 자기가 풍자적으로 대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욥의 양심이 죽기까지 자신이 악인이 아니라고 보증한다면, 친구들이 몰아가는 것처럼 욥이 악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므로, 욥이 말하는 악인의 필망은 자기의 운명을 두고 말하는 모순이 아니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지 않을까요?

1. 욥의 결백에 대한 맹세(27: 1-6)

욥은 세 친구를 향하여 자신의 결백을 또 다시 주장합니다. 이제 논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봐서 그런지 아주 비장한 각오로 무죄를 맹세합니다. 2-6절을 보세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 내게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이 내 코에 불어 넣으신 숨결이 내 코에 남아 있는 한, 내가 입술로 결코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내가 혀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여기 보면 욥은 맹세할 때 흔히 쓰는 용어들, 즉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2절), ‘나는 죽기까지’(5절) 등의 말을 내 세우며 자신의 결백을 천명합니다. 여기서 ‘호흡’과 ‘숨결’이라는 말이 신체 기관인 ‘코’와, ‘악한 말’과 ‘거짓 말’이 ‘입술’과 각각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의 양심과 신체 기관까지도 하나가 되어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다는 뜻이지요. 욥의 결백에 대한 맹세는 하나님과 친구들과 자기의 양심을 겨냥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2-3절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정의로움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개탄합니다. 4-5절은 친구들을 향하여 자기가 지금까지 한 말이 결코 악한 말이나 거짓말이 아니며 오히려 친구들이 내뱉은 말이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6절은 욥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하여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이 조금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욥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당한 징벌을 주시는 것을 인정하거나 친구들이 악인이라고 몰아 부치는 주장을 수용할 경우, 욥이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펼쳐온 무죄 주장은 다 악한 말이요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욥은 ‘맹세’라는 아주 엄중한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구들과 자신의 양심을 향하여 자신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2. 욥의 원수들에 대한 저주(27: 7-12)

7-12절 말씀은 동방의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 욥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랄합니다. 7-10절을 보세요. “내 원수들은 악한 자가 받는 대가를 받아라. 나를 대적하는 자는 악인이 받을 벌을 받아라. 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의 생명을 끊고, 그의 영혼을 불러 가실 때에, 그의 희망이란 과연 무엇이겠느냐?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겠느냐? 그들은 전능하신 분께서 주시는 기쁨을 사모했어야 했고 그분께 기도했어야 했다.”

착한 사람 욥에게 나온 말로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아주 심한 독설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도대체 누구를 지칭할까요? 친구들, 아니면 하나님? 하나님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친구들? “생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도 있듯이 친구들이 해도 너무 하니까 욥이 이렇게 극단적인 저주를 퍼붓는 것일까요? 친구라는 것들이 낡은 이론인 인과율만 가지고 자기를 아예 악인으로 단정하고 죄인 심문하듯이 다루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서 이런 독설을 내뿜는 것일까요? 학자들은 대개 욥이 말하는 저주받을 원수가 친구들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냥 자기 탄식으로 볼 수는 없을까요? 다시 말해 실질적으로 세 친구들과 같이 어떤 특정 그룹을 향하여 내뱉는 독설이 아니라 대화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고 친구들도 더 이상 믿지 못하겠고 해서 욥이 내뱉은 분노의 탄식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욥이 직접 ‘너희 친구놈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3인칭을 주어로 해서 막연하게 ‘내 원수들,’ ‘대적하는 자,’ ‘그’라고 빗댄 것에서도 드러나지 않습니까? 저의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욥의 신실한 인격과 이러한 저주가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시도해본 완곡한 해석일 뿐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심문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이라고 해도 욥이 그 친구들을 모조리 싸잡아 저주받을 원수로 매도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물론 전후문맥으로 봐서 친구들을 염두에 둔 발언인 것은 그럴듯한데, 참 해석하기가 난감합니다.

욥은 이렇게 죄 없는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가상의 원수들에게 준엄한 심판이 있음을 탄식조로 규탄한 뒤 이제 친구들을 직접 겨냥합니다. 11-12절에서 친구들이 걸핏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운운하며 자기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자기더러 설명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도 다 알고 있는, 이같이 공허한 말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처럼 부당한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변호하는 공허한 이론을 자기는 피하겠다는 것이지요!

3. 악인의 비참한 최후(27: 13-23)

13-23절은 빌닷과 소발이 이미 했던 말들이기에 새롭지 않습니다. 악인은 그 많던 자손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고 살아남더라도 가난과 질병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14-15절). 아무리 재산을 많이 긁어모아도 의로운 사람 차지가 되고 말 것이며 결국 알거지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16-19절). 악인은 두려움에서 떠나지 못하며 순식간에 재앙을 만나서 모든 것을 날리게 된다는 것입니다(20-23절). 욥을 악인이라고 단정 짓고 친구들이 주장했던 말들이 거의 큰 변화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이 말이 소발이나 빌닷이 직접 욥에게 한 말이 아니라 욥이 친구들이 했던 말을 풍자적으로 대신 되풀이한 것으로서 해석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욥 자신이 친구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말이라고 할 경우, 그 내용이 친구들이 욥을 악인으로 단정해서 쏟아놓은 말들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다 욥 자신의 필연적인 멸망에 관한 발언이 되어서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도 역설적인 혹은 반어법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욥이 악인은 기필코 망한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발설한다고 할 경우, 자기야말로 이 같이 멸망당할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의 결백성을 강조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으로 자기가 필경 망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석할 경우 위에서 살펴본 7-10절 말씀과도 연결되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비록 욥이 저주받을 원수로서 자기 친구들을 명시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욥의 결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친구든 누구든 아무나 다 잠재적인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친구들이 이미 주장했던 그 악인들의 비참한 최후를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자기는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할 수도 있는 동시에 자기는 비껴나가고 그 대신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이 악인의 범주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편집 비평을 따르지 않고 좀 더 보수적으로 성서 원문에 나타난 그대로를 존중한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원문에 나타난 문학 양식을 검토해 본 다음에 신중하게 말해야 할 사안이기에 제 해석이 100% 옳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양심에 따른 맹세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욥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자기 양심의 이름으로 죽기까지 자기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맹세했습니다. 이제 친구들과의 논쟁이 아무 결말 없이 파국으로 치달리니까 최후통첩 형식으로 자신의 무죄를 이렇게 엄숙한 맹세의 방법으로 선언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전형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양심입니다. 신학자 조셉 버틀러는 양심이 ‘내면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이해 또는 지각의 경향’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양심이 화인 맞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은 하나님이 아시고 혹 사람들은 몰라도 내 자신이 압니다.

사실 욥의 경우만 두고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아시는 욥,’ ‘사탄이 아는 욥,’ ‘친구들이 아는 욥,’ 그리고 ‘욥 자신의 양심이 아는 욥,’ 네 가지의 욥이 서로 다툽니다. 독자들은 하나님과 욥 자신이 알고 있는 욥과 사탄과 친구들이 아는 욥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압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과 욥의 양심이 알고 있는 욥은, 욥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몰라서 그렇지, 서로 일치하는가 하면 , 사탄이 알고 있는 욥과 친구들이 알고 있는 욥 또한 서로 엇비슷합니다. 결국 욥기는 이와 같은 양 진영의 대결 구도로 전개된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과 욥 자신이 알고 있는 욥이 사탄과 친구들이 알고 있는 욥을 마침내 이깁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시는 나와 내 자신이 아는 나, 그리고 사람들이 아는 나가 일치할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아는 나와 하나님과 내가 아는 나 사이에 괴리가 심하다면 아무리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실패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욥처럼 하나님과 자기의 양심이 아는 나와 사탄과 친구들이 아는 나 사이가 서로 달라서 많은 오해와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결국 진리와 양심은 승리할 것입니다. 여기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양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 사이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의 일치가 가능할까 하는 물음이겠지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롬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