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24/ 빌닷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욥26:1-14 본문은 욥이 빌닷의 세 번째 발언에 대해서 응답한 말씀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특히 26: 5-14절의 말씀을 빌닷의 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25장에서 빌닷이 주장했던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찬양이 여기에서도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욥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오늘 말씀이 전후문맥으로 봐서 빌닷의 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어법이라는 논리 형식도 있기에 욥이 빌닷의 말을 이어받아 빌닷이 해야 할 말을 비꼬는 투로 대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을 원문 그대로 욥의 발언으로 보고자합니다. 1. 빌닷의 발언에 대한 욥의 비꼼(26: 1-4) 빌닷은 욥이 미천한 주제에 하나님 앞에 감히 자신의 의로움과 깨끗함을 내세우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내세우며 욥이 부당한 고통을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라는 일갈이지요. 여기에 대해 욥은 야유로 대꾸합니다. 2-4절을 보세요.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여 주니, 고맙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도와주다니! 너는 우둔한 나를 잘 깨우쳐 주었고, 네 지혜를 내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누가, 네게 한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빌닷의 핀잔에 대해서 빈정거리는 투로 맞 받아치는 것이지요. 그가 욥을 잘 지도해주어서 고맙다고 비꼬면서 자기 말을 덧보태기까지 합니다. 욥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라고 했는데 자기는 \'가난하고,\' \'힘없고,\' \'우둔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식당에 갔더니 반찬을 인색하게 아주 조금 줍니다. 그 때 반어법으로 \"참, 푸짐하게도 준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빌닷이 욥의 비천함을 들먹거리자, \"그래, 그렇게 좋은 말 해주어서 고맙다. 그래, 나는 구더기 같고 벌레 같아. 네 말이 다 맞아. 어디 그 뿐인지 알아. 나는 가난하고 힘없고 우둔하기까지 해!\" 뭐, 이런 식으로 비꼬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 후반부에 보면 욥은 \"너는 누구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그런 말을 하느냐?\"며 다그치는 모양이 중요합니다. 4: 12-17절에서 엘리바스가 욥을 공박할 때에도 신비한 체험 운운한 적이 있습니다. 빌닷이 영적인 체험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혹시 계시라도 받아서 자기에게 이 말을 한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영분별은 중요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악령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일 4: 1절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에게서 났는가를 시험하여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욥이 보기에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이 심히 위대하니 너 구더기와 벌레 같은 욥아, 입 닥치고 잠잠히 있어라!\"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5-14절의 말씀을 읽으면 훨씬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빌닷, 네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해서 말했는데 나라고 모를쏘냐? 어디 내가 한 번 읊어 볼 테니 들어볼래!\" 이 부분은 이렇게 빌닷의 빈 말에 대한 욥의 반어법적인 대응으로 나온 말로 봐야 합니다. 2. 욥의 우주론 찬양(26: 5-14) 이 부분에서 욥이 말한 내용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 그 자체로서는 조금도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빌닷에 대한 반발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운행은 물론이고 죽은 사람들이 가는 스올의 세계까지 주관하시는 분임을 역설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 지하 세계까지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것이지요. 5-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관장하시는 권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올의 세계도 훤히 꿰뚫고 보시며(6절), 하늘을 허공에 펼쳐 놓으시고 땅덩이를 빈 곳에 매달아 놓으셨습니다(7절). 구름 속에 물을 채우셔서 비를 관장하시는데 빗물이 터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8절). 보름달을 띄우시고(9절),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10절). 하나님께서 한 번 성을 내시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도 흔들립니다(11절). 하나님은 변화무쌍한 바다도 정복하시고 이 바다를 혼돈과 악으로 몰고 가는 바다 괴물 라합도 쳐부수십니다(12절). 하나님이 콧김을 한 번 훅 불면 흐렸던 하늘이 금방 맑게 개입니다(13절). 하나님은 혼돈과 변덕으로 가득찬 우주 자연을 확실히 장악하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던 욥이 14절에서 내린 결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분이 하시는 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는 것도 가냘픈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분의 권능에 찬 우레 소리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빌닷도 하나님의 주권을 언급했고 자신도 빌닷의 말을 이어 하나님의 그 엄청난 권능에 대해서 열거했지만 이것은 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나 영감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미약한 속삭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4절 후반부에서 욥이 \"누구의 영감을 받아서 나를 가르치려느냐?\" 하고 따진 말씀과 직결됩니다. 빌닷을 비롯한 친구들이 혹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하여 자기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다고 일축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말이 \'하나님의 권능에 찬 우레 소리\'인데 \'가냘픈 속삭임\'과 잘 대조가 됩니다. 친구들이 영감을 받는다면 순전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가냘프게 속삭이는 정도로 그렇다면, 자기는 너무나 생생한 고통의 체험 한 가운데에서 우레 소리 마냥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아닐까요? 관념과 이론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경험과 실천 속에서 듣는 주님의 음성은 가냘픈 속삭임과 거대한 우레 소리의 차이만큼 크다는 외침이 아닐까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영감의 진정성 여부는, 즉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사탄에게서 왔는지는 그 열매를 통해 가려집니다. 예수님도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셨으며(마 7: 20 참조), 사도 바울 역시 성령 체험은 그 열매를 통해서 진실성이 입증된다고 했습니다(갈 5: 22-23). 그렇다면 불의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욥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너에게 한 수 가르친다.\"는 언행은 진실한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상처를 쓰다듬고 위로하라고 말씀하시지 훈계하고 충고하라고 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욥이 말한 것처럼 친구들의 영감은 하나님으로부터 겨우 가냘픈 속삭임 정도를 들은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지만 우리는 \"내가 기도해보니…\" 혹은 \"내가 꿈에 환상과 계시를 받았는데…\" 하는 식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 조심해야 할 태도입니다. 영감과 계시라는 이름으로 더 큰 고통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욥이 제시한 우주관이 현대의 자연과학적 우주관과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봅니다.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은 욥이 그리고 있는 우주가 다분히 시인의 상상력에서 나온 신화적인 산물이라며 비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측 불허인, 혼돈과 악으로 점철된 하늘과 땅과 바다, 심지어 지하 세계까지 자유자재로 통제하신다는 말에 냉소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피뢰침이 나온 시대에 제우스의 벼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학이 나오면 종교적인 영역이 꼬리를 감춘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문제 속에 빠져들었고 종교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융성해집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과학 기술로만 인간의 문제, 세계의 수수께끼를 다 풀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체를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 해와 달과 무수한 위성들에 대해서 아무리 연구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라는 미지의 숙제는 여전히 따라 붙습니다. 욥이 한 편의 회화처럼 묘사했듯이,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물을 채우시고 물이 밑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계신다는 이야기는 구름과 비의 생성 원인을 아는 과학도들이 들을 때 우스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인 물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저는 욥의 세 친구들이 그토록 붙들려고 했던 세계관, 즉 인과율이 바로 과학 법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놀랐습니다. 과학의 제일가는 전제가 \"원인 없이 결과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우주의 신비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과학적 가설을 세우고 관측과 실험을 통해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려고 하는 것이 과학의 세계이지요. 친구들은 바로 이러한 합리적 인과율을 가지고 욥의 고통을 해석합니다. 이것이 문제이지요! 욥의 고통은 과학적인 합리성으로만 해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해진 인과율의 법칙을 뛰어넘어 전혀 우발적인 일도 하실 수 있는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인과성과 합리성만으로 움직이는 세계, 즉 결정론에 의해 지배되는 그런 세계는 질서는 있고 예측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참 숨막히게 단조로운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욥기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이 인과성과 합리성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세계관의 오만이 아닐까요! 그런즉 욥이 제시하고 있는 신앙적 우주관은 과학기술이 대답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있는 인간의 궁극적 신비를 지시하는,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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