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3/ 빌닷의 세번째 공박

욥기강해23/ 빌닷의 세 번째 공박: \"어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욥25:1-6


비판적인 학자들은 22-27장에 이르는 셋째 바퀴의 논쟁이 대단히 혼란스럽다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이것은 둘째 바퀴 논쟁까지 엘리바스→빌닷→소발 순으로 등장하던 친구들 중에 소발이 빠졌다는 사실과 욥의 입으로 한 말들 중에 그동안 친구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학자들은 이와 같은 편집적인 혼선을 우연으로 보기도 하고 욥의 주장이 지나치게 대담하고 불경스럽게 보이기에 저자가 욥의 언어를 순화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그랬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복잡한 내용을 소개하는 일은 우리의 관심 밖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있는 원문 그대로 따르려고 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3라운드까지의 논쟁이 지루하게 되풀이 되다보니 네 사람 모두 지쳤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친구들의 논리가 바닥이 난 것처럼 보이기에 욥의 발언 속에는 그동안 친구들이 주장했던 내용들을 비꼬는 투의 인용하는 형식으로 친구들의 논지를 대거 포함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발의 발언은 아예 빠져 있고 빌닷의 말도 겨우 6구절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친구들의 할 말이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욥이 친구들이 했던 말을 자기 입으로 정리해서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인간(25: 1-6)

\'빌닷의 세 번째 말\'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오늘 본문 말씀은 욥기에서 가장 짧습니다. 총 6절 밖에 되지 않기에 겨우 서론만 말하다가 끝난 느낌이 듭니다. 거기에다가 절대적인 권능을 갖추신 하나님에 비해 인간은 지나치게 미천하다는 주제도 결코 신선하지 못하며 상투적이기까지 합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서 우주의 질서와 안정을 주관하심으로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함으로서 말문을 엽니다(2절). 또한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군대를 거느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어디든지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주장합니다(3절). 이것은 5절과 다시 연결되는데 달이 아무리 밝고, 별이 아무리 맑고 깨끗해도 결코 하나님께는 비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양 같은 분이시지요. 여기서 하늘 나라, 군대, 빛, 달, 별, 등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위엄을 강조하는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빌닷이 이렇게 그 어떤 천체와도 견줄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강조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밝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달과 별들도 감히 하나님께 견줄 수 없는데 하물며 미천한 인간은 말해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지요! 4절과 6절을 보세요. \"그러니 어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겠으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어찌 깨끗하다고 하겠느냐?\"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여기 보세요.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에 비해 인간은 구더기와 벌레같이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구더기와 벌레는 죽고 부패해서 결국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에게서 난, 구더기와 벌레 같은 인간은 아무리 의롭다고 한들 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하나님 앞에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다는 주장이지요.

사실 이 말씀은 빌닷이 엘리바스의 첫 번째 발언과 두 번째 발언에서 빌려온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종들까지도 믿지 않으시고, 천사들에게마저도 허물이 있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흙으로 만든 몸을 입고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사람이겠느냐?\"(4: 17-19절).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마저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신다. 그 분 눈에는 푸른 하늘도 깨끗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하물며 구역질 나도록 부패하여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15: 14-16). 이렇게 빌닷이 엘리바스의 발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엘리바스가 가장 연장자일 뿐 아니라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지도급 인사라고 말할 수 있는 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닷이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욥의 기를 팍 죽여서 하나님께 꼼짝 말고 죄를 다 털어놓고 빌라는 의도이지요! 욥이 아무리 의롭고 깨끗하다고 주장한들 감히 구더기와 벌레 같이 미천한 몸이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는 일갈입니다! 하나 새로울 것이 없는 친구들의 상투적인 주장이지요.

2.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3라운드에 접어들어 논리가 다 바닥이 나자 빌닷이 선배인 엘리바스가 말했던 내용을 다시 끌어 들여 진부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욥이라고 해서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 앞에 깨끗지 못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겠습니까? 이것은 26장에서 빌닷의 발언에 대해 응답할 때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아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가 에 대해서 빌닷이 미처 다 발설하지 못한 내용까지 자기가 다 대신해서 정리해주는, 보충 설명의 친절까지 보입니다. 욥이라는 아주 특이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과 상관없는 말이라면 빌닷의 말은 옳습니다. 인간의 원죄와 전적 부패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인간관과도 합치합니다. 렘 17: 9절은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3장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며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의롭고 깨끗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미천함, 이것은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겨냥하는 대상과 상황이 중요합니다. 욥에게 이러한 진리를 선언해서 아예 입을 봉쇄하겠다는 태도는 친구로서는 물론이고 논쟁자로서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저는 욥 25장을 시 8편과 비교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을 찬양하는데는 양자가 일치하지만 창조 질서내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릅니다. 아마도 빌닷은 하나님을 태양쯤으로 설정해 놓고 달이나 별들의 빛이 결코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구더기와 벌레 같은 존재로서 달이나 별들보다도 형편없이 못하다고 비관했습니다. 그러나 시 8: 4-8절을 보세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인간의 부패함과 미천함 대신에 피조 세계에서 인간이 아주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탁받았습니다. 이렇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는데 빌닷은 사정없이 그 관을 벗겨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선천적 한계성과 고통은 분명히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인간에게 \"너, 구더기 같고 벌레 같으니 입 닥쳐라!\" 하는 말은 가당치 않지요.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께 비길 수 없이 미천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창 1: 26-27)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쓴 특별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아서 일방적으로 깎아 내리는 것도 기독교적 인간관의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라인홀드 니이버가 인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죄로서 교만과 나태를 든 것은 옳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자리를 넘보는 것은 교만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을 주셨음에도 이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 것은 나태의 죄입니다. 교만도 문제이지만 나태 역시 작지 않은 죄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국제 결혼한 자매들이 모이는 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딱했던 것 중에 하나는 자매들 중에 일부가 지나친 죄책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를 학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예 인생을 포기하는 쪽이나,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 예컨대 비국제 결혼한 사람들을 피하거나 따돌리는 쪽으로 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빌닷은 이 점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나치게 자기를 비하하는 것도 죄악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간의 원초적 형상은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과 자연인의 접촉점이 완전히 단절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양심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님 형상의 잔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씌워주신 영광과 존귀의 관을 되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더기와 벌레 같이 무기력한 우리를 위하여 일방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상(模像)을 입어 모든 피조물 중에 아주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우리와 함께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