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2/ 엘리바스의 세번째 공박

욥기강해22/ 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욥24:1-25


욥기가 중반 이후부터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인다면 욥의 날카로운 사회 의식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율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는 반면에 욥은 자기 외에도 이같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욥의 안목은 점점 넓어져 개인적인 질문들을 사회적이며 예언자적인 것들로 확대시켜 날카로운 예각을 세우게 됩니다. 이미 이러한 조짐은 악인의 필망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친구들에 대하여 정반대의 현실을 폭로하며 반박할 때부터 움트기 시작했습니다(21장 참조). 이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은 점점 더 시야를 넓혀 마침내 착취와 수탈을 당하는 이웃들의 고통까지 끌어안고 고뇌하는 욥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24장은 부자와 세도가에 의해 억압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셋째 마당의 대화에서 오면 친구들과 욥의 발언이 경계선이 불분명해집니다. 긴 시간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혈전을 벌여서 그런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논점이 흐려집니다. 권투 시합에서 3회전 동안 사투를 벌여온 선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소모되어 자주 클린칭을하고 주먹이 서로 엉겨붙어 나중에 누구의 주먹인지 알 수 없게 되는 형국처럼 되고 만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24: 18-25절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이 욥이 엘리바스에 응답한 말씀 안에 들어가 있지만 욥의 평소 주장과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흔히 소발의 발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셋째 마당의 논쟁에서 소발의 이름이 빠졌다는 사실과 이 부분의 내용이 악인의 필망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소발의 주장(20장 참조)과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주장하고 있는 악인의 일시적 번영과 급작스러운 멸망은 빌닷의 주장(18장)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발의 발언이라고 단정짓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셋째 바퀴의 설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독 소발만 빠져 있기 때문에 소발의 발언으로 유추하는 것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성경의 원문 그대로 욥의 발언이라고 보는 것도 틀린 견해는 아닐 것이며, 저는 이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욥 역시 친구들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고, 더욱이 친구들이 내뱉은 진리의 말을 비꼬듯이 인용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악인에 대한 심판의 날은 언제?(24: 1)

23장에서 욥은 하나님의 장소 문제를 추적했다면, 24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 문제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때를 정하셨다면 억압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1절).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날을 미리 정해두셨다면 악인은 두려워서 함부로 악행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안에 있습니다(행 1: 7 참조). 또한 하나님께서 심판을 더디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를 오래 참으셔서 긍휼과 자비로 기다리시는 까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벧후 3: 8-13절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 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 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이웃의 참상(24: 2-25)

21장에서 욥은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악인의 장수와 번성에 대해서 전율했습니다. 22장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24: 2-12절에서 욥은 무죄한 사람들이 악인에 의해 당하는 참상을 아주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서 엘리바스의 주장을 다시 반박합니다. 여기서 무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없이 많다는 동료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더욱이 이 고통이 부자와 권세가에 의한 조직적인 약탈과 착취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회적 고발의식이 두드러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누구나 다 어떤 정의감 때문에 혀를 차고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 정도로 리얼합니다. 2-12절을 보세요.

\"경계선까지 옮기고 남의 가축을 빼앗아 제 우리에 집어 넣는 사람도 있고,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가난한 사람들이 권리를 빼앗기는가 하면, 흙에 묻혀 사는 가련한 사람들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서 숨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나귀처럼 메마른 곳으로 가서, 일거리를 찾고 먹거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먹일 것을 찾을 곳은 빈 들뿐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줍고, 악한 자의 포도밭에서 남의 것이나 긁어 모은다. 잠자리에서도 덮을 것이 없으며, 추위를 막아 줄 이불 조각 하나도 없다. 산에서 쏟아지는 소낙비에 젖어도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바위 밑밖에 없다.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를 노예로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빚을 못 갚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지도 못한 채로 헐벗고 다녀야 한다. 곡식단을 지고 나르지만,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올리브로 기름을 짜고, 포도로 포도주를 담가도, 그들은 여전히 목말라 한다. 성읍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신다.\"

아, 억압자와 피억압자, 수탈자와 피수탈자의 물고 물리는 참상을 이 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을까요! 이들은 부와 권력을 독점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대합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모순과 부조리는 생산자가 응당 누려야 할 생산의 이익을 제 몫으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식량과 포도주를 생산하는 사람이 굶주리고 목말라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집 없이 떠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못된 짓을 골라하는 악인들은 13-17절에 보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주로 한 밤중에 악행을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같이 한낮을 무서워하고 한 밤중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은 오늘까지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고난의 참상을 일거에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12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귀와 입을 닫고 침묵만 하신다고 한탄합니다. 욥이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 소송을 걸 듯이 다 털어놓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가 다시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엄폐, 소리 없는 하나님의 침묵에 화들짝 놀라듯이 마치 하나님이 없기라도 하듯이 이와 같은 악행이 너무나 당연하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탄식이지요! 희망에 들뜬 상승과 절망에 사로잡힌 좌초, 이것이 욥이 자기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 때마다 매번 경험하는 시소놀이의 역설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결국 1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언제냐고 묻는 욥의 울부짖음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맥락에서 18-25절을 보면 욥이 세 친구들의 말을 종합해서 풍자적으로 인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욥 자신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친구들이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이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빌닷이나, 특히 소발의 발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만, 이렇게 천인공노할 악인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염원하는 욥의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욥이 죄없이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모든 이웃들과 자기를 동일화할 때 이와 같은 악인의 졸속한 멸망에 대한 기대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악인은 잠시 동안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린 나무처럼 망하고 말 것이며 결국 구더기 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들에게 안정을 주셔서 그들을 평안하게 하여 주시는 듯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낱낱이 살피신다. 악인들은 잠시 번영하다가 곧 사라지고, 풀처럼 마르고 시들며, 곡식 이삭처럼 잘리는 법이다\"(23-24절). 욥이 1절에서 염원했던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희망이지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기를 읽을수록 놀라는 것은 욥의 지평이 날로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처럼 부당하게 고난 당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본격적으로 체감하고 대담한 필치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욥이 서술한 내용 그대로 비참한 실상에 빠진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는 물론이고 공산주의와 전제주의의 억압 속에 신음하는 국민들은 훨씬 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불의한 정권의 압제하에 굶주리고 헐벗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욥이 이러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합니다. \"가재는 게 편이다.\"라는 속담처럼 자기가 부당한 고난을 당하기에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품고 옹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앞으로 우리는 욥이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온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서 봐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욥이 불의한 자들의 악행을 가차없이 고발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정의 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웃을 부당하게 학대하는 쪽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한문으로 \'평화\'(平和)라는 말을 뜯어서 분석해보면 골고루 한다는 \'平\'자와 벼 \'禾\'와 입 \'口\'가 연합된 화목할 \'和\'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밥이 입에 골고루 들어가게 함으로서 두루 화목해진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우리는 부당하게 억압받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을 잊어서 안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사 65: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