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1/ 엘리바스의 세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21/ 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욥23:1-17


욥이 만일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입을 닫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욥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겨났더라도 인과응보론이나 되뇌는 아주 얄팍하고 고답적인 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기가 위대한 것은 불의한 고난을 당하면서 의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3회전에 접어들면서 엘리바스의 요점은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할 뿐 신선한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욥의 사회 윤리적인 죄악들을 폭로하는 것이 새로운 국면이라면 새롭다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좁은 시야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할 말이 많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이 이웃을 억압하고 수탈했다고 질타해서 그런지 욥은 자기의 고통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 나눕니다. 이른바 고난의 연대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욥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기 전 유복했을 때에는 부자와 세도가들에 의해 무방비로 착취당하는 이웃의 불의한 고통을 깊이 체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겪어보니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로소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게 됩니다. 24장 이후에 전개될 욥의 발언 중 가장 주목해서 지켜봐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개인적인 부조리에서 공동체적인 부조리로, 실존적인 차원에서 예언자적인 차원으로 시야가 확대 심화되고 있습니다!

23-24장은 엘리바스의 세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입니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 즉 인격적인 교제를 갈망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욥은 23장에서 하나님의 장소에 대해서, 그리고 24장에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서 묻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있다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터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칠흑같은 어두움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시간을 정해주신다면 압제받는 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정당하게 해결될 터인데 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욥이 23장에서 장소와 관련해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를 소원할 때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짙고, 24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말할 때 자기처럼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로 시계를 넓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계신 곳을 찾아서(23: 2-12)

23-24장에서 욥은 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에 대한 응답을 시도하지만 주로 내면의 독백 형태로 말을 이어갑니다. 깊은 자의식 속에 잠겨 하나의 기도형태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욥의 이러한 모습은 어거스틴이 자기 안 깊숙이 계신 하나님을 너무 멀리 바깥에서 찾아 헤맸다는 탄식을 연상하게 합니다. 욥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흐름 중에 하나는 사법적인 요소입니다. 피고가 증인을 대동해서 재판관 앞에 공정한 심판을 받듯이 욥도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만나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따지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곳에 가서 왜 자기가 부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재판을 받기 원합니다. 친구들이 자기의 결백에 대해서 증언을 해주면 좋으련만 오히려 고통만 가중시킵니다. 그래서 정의의 심판이 이루지는 곳, 하나님 계신 곳에 가서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기를 희망합니다.

3-4절을 보세요.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닿도록 변론하련만.\" 독백 형태로 된 기도문이라고 봐도 좋을 소원입니다. 욥은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가 소송을 제기해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다 항변하고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받기 원합니다. 이렇게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입이 닿도록 변론하면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며 무죄를 선언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7절). 어떻게 보면 욥이 아무 죄없이 이 처절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공정한 룰이 작용하는 재판정에서 다 털어놓을 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토록 하나님 만나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8-9절). 전후좌우,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탄식입니다. 이른바 \'숨어 계신 하나님\'을 확인하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다는 욥의 탄식은 불의한 현실에 귀를 닫으시고 입을 닫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 더욱 더 애절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욥은 하나님을 찾아 헤매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욥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기막힌 역설이 아닙니까? \"우리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한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해주는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마치 승용차 유리창을 썬팅해서 차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는 사람이 무엇 하는지 다 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안을 일체 볼 수 없는 이치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욥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의 처지를 머리털같이 헤아리시는 하나님 계신 그 곳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결백을 아실 것이라는! 10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토록 욥의 발걸음 하나 둘까지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순금이 불순물을 걸러내서 제련되듯이 자신을 시험하신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깨끗함이 입증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성에 대한 품질 검사를 하신다면 틀림없이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이지요! 욥이 이러한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11-12절에 제시된 그대로 자신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욥(23: 13-17)

하나님 계신 곳을 알아보려다가 깊은 좌절감에 빠진 욥은 다시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13-15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분이 한번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으랴? 한번 하려고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고 마시는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계획 가운데, 나를 두고 세우신 계획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겠기에 나는 그분 앞에서 떨리는구나.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이 두렵구나.\" 이 말씀은 사 43: 13절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태초부터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빠져 나갈 자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돌이킬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마음먹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인간의 생사화복에 대한 절대 주권과 자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의 인생행로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므로 욥은 꼼짝하지 못하고 그저 두렵고 떨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지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토록 치신다면 자기는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탄식이지요. 결국 하나님 앞에 자기 문제를 털어놓겠다는 욥의 의지는 하나님의 숨어 계심과 뜻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확인하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끝납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향하신 계획은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시는 하나님, 참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밀실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심문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 밀실과 우두머리급, 즉 수사 반장이나 국장이 있는 방 사이에는 큰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어서 밀실 안에 있는 수사관이나 범인은 밀실 밖을 볼 수 없어도 밖에서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특수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욥의 경우를 이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밀실로 된 취조실 안을 들여다보는 수사반장처럼 하나님은 욥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욥은 볼 수 없습니다. 이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붙잡혀 온 사람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형사들의 폭언과 심지어 고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끝까지 자기 결백을 주장할 때 취조실 밖에 있는 반장이나 국장이 석방해주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증거자료이겠지요. 아무리 다그치고 강압 수사를 해도 아무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밀실 밖에서 다 지켜보고 있던 우두머리는 풀어주라고 지시를 내릴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정확할지 모르지만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물론 이 경우 취조실 밖에서 지켜보는 우두머리는 수사관과 한 통속이 아니라--실제로는 한 통속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반드시 의롭고 공정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조건을 전제해야 하겠지요. 욥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욥의 결백을 아십니다. 친구들은 마치 아무 죄없는 사람을 밀실로 끌고 와 온갖 폭언으로 강압 수사를 벌이는 형사들처럼 욥을 채찍으로 다그치고 당근으로 타이르며 힘들게 해도 하나님은 이 광경을 다 아시고 조용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욥이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욥은 이 진리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직관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23: 10 말씀이 유달리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개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