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20/ 엘리바스의 세번째 공박
욥기강해20/ 엘리바스의 세 번째 공박/욥22:1-30
욥과 세 친구의 설전은 마치 권투 시합과 비슷합니다. 욥은 매 라운드마다 세 친구를 상대해서 힘겹게 싸워야 합니다.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욥이 악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내서 하나님 앞에 꿇어앉히려고 어퍼컷, 잽, 훅, 등 무수한 펀치를 사정없이 날립니다. 욥은 심신이 곯을 대로 곯아 그로기 상태에 있는데 친구들은 연신 강펀치를 날려댑니다. 그러나 욥의 반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자기가 한 대 때릴 때 세 대씩 날라 오는 펀치를 맞고서 지칠 법도 한데 맷집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목숨 하나만 달랑 남았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반격에 반격을 거듭하니 친구 셋을 거뜬히 당해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권투로 치면 이제 2라운드가 끝나고 3라운드로 접어들었습니다.
22-27장까지는 셋째 바퀴의 대화가 나옵니다. 셋째 바퀴 대화에 나오는 친구들의 공박은 1, 2차에 걸쳐 대두된 내용과 비교할 때 생소한 이슈가 별로 없습니다. 전에 했던 말들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인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발의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고 엘리바스와 빌닷이 출두하는데 빌닷의 말은 겨우 여섯 절에 불과합니다(25: 1-6). 이에 비해 흥미롭게도 욥의 대답은 대단히 깁니다. 이것은 3회전에 걸친 혈전 끝에 친구들의 기력이 다 소진돼서 논리가 바닥이 난 반면에 욥은 아직도 하나님과 친구들 앞에 쏟아놓을 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억울한 고난은 사람의 마음 속에 엄청난 한을 쌓아두기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3라운드의 논쟁을 살펴보면 양쪽이 더 이상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공전되는 인상이 짙습니다! 이제 셋째 바퀴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1번 타자인 엘리바스부터 욥을 공격합니다.
1. 하나님이 욥을 책망하시는 이유(22: 2-20)
셋째 바퀴 논쟁에서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전적인 초월성을 언급함으로서 말문을 엽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초월적이시기 때문에 욥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의로울지라도 하나님께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끼쳐드릴 수 있느냐? 아무리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분께 아무런 유익을 끼쳐드릴 수가 없다. 네가 올바르다고 하여 그것이 전능하신 분께 무슨 기쁨이 되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여 그것이 그분께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인간이 쌓은 지혜와 의로움과 순전함이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논리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은 엘리바스 자신이 주장한 하나님의 상선벌악의 논리와 어긋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도덕적 질서가 자리 잡힌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주장해놓고서는 인간의 슬기와 정의와 경건이 하나님께 아무 쓸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지요!
4-5절을 보면 엘리바스는 그러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해서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지었기 때문에 징벌을 받는다고 단언합니다. 이미 충분히 주장했던 논리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특이한 것은 욥이 이웃과 관계해서 지은 죄상을 마치 직접 목격이라도 한 듯이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9절은 이른바 욥의 사회 윤리적인 죄목을 낱낱이 들추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엘리바스와 두 친구들이 악인의 일반적인 운명을 논할 때 사용했던 3인칭을 쓰지 않고 아예 직접적으로 욥을 겨냥해서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까닭 없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빼앗아 헐벗게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너는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이 땅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살았다. 너는 과부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들을 혹사하고 학대하였다.\"
욥이 한 때 부자였을 적에 사회적인 약자인 고아와 과부,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지금 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단정이지요! 엘리바스는 마치 욥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라도 본 듯이 욥이 사회 정의에 어긋나게 살아온 죄상들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추측과 편견, 그리고 단정을 통하여 아무 증거도 대지 않고 욥의 가상적인 죄악들을 사실인 냥 하나 둘 열거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자는 다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해서 그렇게라도 된 냥,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 엘리바스는 이렇게 자기의 이론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즉 악인에게 반드시 징벌을 내리신다는 도덕적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하여 욥에게 아무 증거도 없는 죄의 덤터기까지 씌웁니다! 아, 도그마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요!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또한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악한 행실을 전혀 모르시는 분인 것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한다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이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 않느냐? 저 공중에 높이 떠 있는 별들까지도,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겠으며, 검은 구름 속에 숨어 계시면서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짙은 구름에 그가 둘러싸여 어떻게 보실 수 있겠느냐? 다만 하늘에서만, 왔다갔다 하실 뿐이겠지!\' 하는구나\"(12-14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하나님까지 속여가며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고발이지요.
2. 욥에게 열려 있는 미래의 희망(22: 21-30)
이상과 같이 욥의 죄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폭로한 뒤 엘리바스는 욥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욥이 이 재앙을 받는 것이 다 하나님과 욥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까닭이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선언합니다. 엘리바스는 이제 기력이 다 소진해서 더 이상 발언할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회유적인 제스츄어를 씀으로서 자기 주장에 결론을 맺습니다.
21-26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씀을 네 마음에 깊이 간직하여라. 전능하신 분에게로 겸손하게 돌아가면, 너는 다시 회복될 것이다. 온갖 불의한 것을 네 집 안에서 내버려라. 황금도 티끌 위에다가 내버리고, 오빌의 정금도 계곡의 돌바닥 위에 내던져라.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네 보물이 되시고, 산더미처럼 쌓이는 은이 되실 것이다.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너는, 전능하신 분을 진정으로 의지하게 되고, 그분만이 네 기쁨의 근원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순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회복된다는 말씀이지요. 24-25절 말씀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황금과 오빌에서 나는 정금, 전능하신 분, 은이 한 축을 이루고, 티끌, 계곡의 돌바닥이 정반대 되는 축을 이룹니다. 황금과 은은 아주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보물인데 이 귀한 것들을 초개와 같이 버리게 될 때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도 있듯이 황금만능주의를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이 정금과 순은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기와 세상 자랑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복하라는 재촉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겸손히 복종하면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이루어질 것이고(27절), 하는 일마다 다 형통하며 앞길이 환하게 비취게 될 것(28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해서 회복되면 비로소 욥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결론은 30절입니다. \"그분은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신다. 너도 깨끗하게 되면 그분께서 구해 주실 것이다.\" 욥이 하나님께 돌아와 죄를 다 뉘우치고 순복해서 정의롭게 깨끗해지기만 한다면 지금의 재앙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바스의 말은 하나도 그른 말이 없습니다. 욥과의 대화만 아니라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요 상당히 복음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옳은 말씀이 진행되고 있는 문맥과 배경이 중요합니다. 옳지만 시의 적절한 말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도 순전한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1: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2: 3). 욥은 하나님도 믿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믿습니다. 하나님도 믿어 준 사람, 욥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설득하다니요! 옳은 이야기가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다 보편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엘리바스의 시야는 너무 좁습니다. 자기의 신앙과 인생관 하나만 옳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누구에게나 아무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데 엘리바스의 맹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왜 욥이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착취했다고 단정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엘리바스의 안목이 좁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됩니다. 욥이 옛날에 부자였다는 사실, 현재는 재앙을 당한다는 사실, 현재의 재앙은 반드시 과거의 악행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응보론 등을 종합해 볼 때, 부자였던 욥이 현재 고난을 당하는 것은 과거에 이웃을 수탈했음이 틀림없다는 추론 때문이지요! 여러분, 부자가 가난해지는 것이 사회 정의를 위반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학대해서 거기에 대한 응벌로 고통을 겪는 부자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였다가 고난을 당하는 사람 = 과거에 악당\' 이라는 도식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선익을 베푸는 양심적인 부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엘리바스의 말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 욥과 관련된 말이 아니라면 기가 막히게 훌륭한 주장이지만 욥의 경우를 비롯해서 수없이 많은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자 = 탐욕과 수탈\'이라는 좁은 안경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의로운 부자, 양심적인 부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