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9/ 소발의 두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19/ 소발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욥21:1-34


본문은 욥이 소발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해서 응답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둘째 바퀴 논쟁의 결론부로서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합니다. 빌닷과 소발은 악인이 겪게 될 비참한 말로를 묘사함으로서 어떻게 해서든지 욥을 회개시켜보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욥의 논박은 친구들의 이론과는 달리 현실 경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인과응보의 논리가 이 세상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을 조목조목 거론하면서 두 친구의 입장을 반박합니다. 빌닷과 소발은 악인이 반드시 패망한다고 했지만 현실 세상에는 정반대로 악인이 장수하고 번영하며 죽기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지요. 욥은 이 세상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윤리적인 법칙을 따라 정확하게 움직여 나가는 곳이 아니라 뒤죽박죽,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차 있음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1. 친구들에 대한 욥의 항의(21: 1-6)

\"너희는 내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말아라. 너희가 나를 위로할 생각이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이다\"(2절). 욥은 친구들이 자기를 위로한다고 내뱉는 말들이 하나 같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이들은 욥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적인 도그마, 이데올로기만 열심히 설파했습니다. 그것도 정확한 관찰이나 실제적인 체험이 아닌 편견과 추측에 의거해서 아예 욥을 악인으로 단정지으며 악인의 말로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욥이 당연히 받을만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고통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시키려고 했지요. 이렇게 이들과 욥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친구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쳤던 인과율이라는 교리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 특정 이론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아무 비판 없이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반면에 욥은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너무나 리얼한 현실 경험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출발점과 처한 입장이 다르기에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옳다고 할지라도 욥에게는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전가의 보도인 냥 줄기차게 부르짖는 악인의 필망(必亡)은 욥 자신의 경험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경험과도 정확하게 합치하지 않는 공허한 이론일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욥에게 이들이야말로 \'돌팔이 의사들\'(13: 4)이요,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16: 2)에 불과했으며, 온갖 빈말로 위로한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거짓말쟁이(21: 34)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2. 거꾸로 가는 세상: 악인의 번성(21: 7-34)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기억에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자기 경험을 들어보라고 호소합니다(6절). 빌닷과 소발이 그렇게 목소리 높였던 \'악인의 멸망\'이 자기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의 실제 경험으로 보면 거꾸로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세요.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욥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으로 친구들이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의 현실, 즉 악인이 장수하고 번영한다는 사실을 고발합니다. 악인들이 징벌을 받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8-13절을 보세요.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그들의 수소는 틀림없이 새끼를 배게 하며, 암소는 새끼를 밸 때마다 잘도 낳는다. 어린 자식들은, 바깥에다가 풀어 놓으면, 양 떼처럼 뛰논다. 소구와 거문고에 맞춰서 목청을 돋우며, 피리 소리에 어울려서 흥겨워하는구나.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이 조용하게 스올에 내려간다.\" 빌닷과 소발이 생생하게 묘사했던 악인의 멸망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받아 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을 때에도 아무 고통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발은 악인의 형통이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 있다고 지적했지만 욥의 분석은 더 예리합니다. 물론 탐욕이 중요한 요인이지만 불신앙과 불경건이 더 근원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14-16절을 보세요. \"그런데도 악한 자들은, 자기들을 그냥 좀 내 버려 두라고 하나님께 불평을 한다. 이렇게 살면 되지,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무엇이냐고 한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이기에, 그를 섬기며, 그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공이 자기들 힘으로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모든 번영이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인 냥 착각하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형통한다, 이것이 욥과 같은 순전한 신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고 헌금하는 행위는 바보짓이며 기도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미신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그것도 죽을 때까지 아무 징벌을 받지 않고서!

여기서 악인의 죽음을 잠시 생각해봅시다. 23-26절에서 욥은 두 종류의 죽음을 언급합니다. 악인과 선인의 죽음이지요.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기력이 정정하다. 죽을 때에도 행복하게, 편안하게 죽는다. 평소에 그의 몸은 어느 한 곳도 영양이 부족하지 않으며, 뼈마디마다 생기가 넘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다.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은 다 함께 티끌 속에 눕고 말며, 하나같이 구더기로 덮이는 신세가 된다.\" 빌닷과 소발이 묘사했던 악인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반박하는 말씀입니다. 죽을 병에 걸려 죽음의 왕에게 끌려가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주장을 반격하는 것이지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악인은 죽을 때에도 멋지게 임종을 맞는가 하면 선인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날 때가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오직 죽음만이 악인이나 선인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것임을 역설합니다. 죽은 뒤에 둘 다 먼지 속에 눕고 구더기의 밥이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 욥은 이와 같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18: 5에서 빌닷은 악인의 빛은 꺼지게 마련이고 그 불꽃도 빛을 잃고 만다고 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세요. \"악한 자들의 등불이 꺼진 일이 있느냐? 과연 그들에게 재앙이 닥친 일이 있느냐?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그들을 고통에 빠지게 하신 적이 있느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폭풍에 날리는 겨와 같이 된 적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셔서 악인을 손 좀 봐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19-22절은 악인의 징벌이 자손에까지 미친다는 친구들 주장의 허구성을 반박하기 위하여 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본인이 져야 한다는, 율법적인 견해와는 매우 색다른 그 당시로서는 진보적이기까지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출 20: 5절과 신 5: 9절에 보면 아비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갚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친구들 역시 이와 같은 연좌적 징벌제에 공감했는데 욥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스스로 받아야지만 제 죄를 깨닫게 되지 자손들에게 이어진다는 것은 책임회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33절에서 욥은 친구들을 겨냥하여 직격탄을 날립니다. 친구들, 특히 빌닷은 악인의 집이 무너지며 그와 관련된 일체의 기억이 사라진다고 주장했지만 역시 현실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18: 20절에서 빌닷은 동서남북에서 온 사람들이 악인의 말로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떤다고 했는데 29절에서 욥은 길가는 여행자들이 정반대의 소식을 전해준다고 말합니다. 즉, 빌닷은 악인의 집안을 환하게 비추던 불빛이 다 꺼지고 집에서 쫓겨나 죽음의 왕 앞에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고 했는데(18: 6, 14-15; 19: 28 참고), 나그네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접 겪은 풍부한 경험에 의거해서 전하는 말은 그 반대입니다. \"그가 죽어 무덤으로 갈 때에는, 그 화려하게 가꾼 무덤으로 갈 때에는,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한다\"(32-33절).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문이 넓은 이 여행자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 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 그 악한 자를 꾸짖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30-31절). 어쩌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도 애꿎은 사람이 다칠 때가 많고 악인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간다는 말이지요! 현실적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이 잘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주장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오늘 말씀의 결론부인 34절에서 욥은 친구들이 하는 말이 온통 빈말이며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빈말\'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원어로 \'수증기,\' 혹은 \'숨결\'을 의미하며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 즉 \'허무함\' 혹은 \'허탄함\'은 구약에서 거짓 신과 우상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신 32: 21; 렘 8: 19, 10: 8, 14: 22; 시 31: 6; 욘 2: 8 참조). 그렇다면 욥은 친구들의 말이 헛것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욥이 보기에 이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세상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역사 속에서 신비롭게 활동하시는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도그마와 이데올로기에 갇힌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선에는 반드시 상을, 악에는 반드시 벌이라는 단순 논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하나의 관념적 우상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직접 경험하는 진실은 확실히 욥의 말이 맞습니다. 빌닷이나 소발이 강조했듯이 악인이 비참하게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고서도 금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갖 안일과 풍요를 누리는 악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와 같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현실 경험을 인정하지 않고 정통 교리만 기계적으로 뇌까리는 행위야말로 빈말이요 거짓이며 참 신비의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욥기의 결론부에 가면 하나님께서 욥의 말이 옳고 친구들의 말이 틀렸다고 말씀하시면서 노를 발하시는 것으로도 확인됩니다(42: 7). 이렇게 본다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악인 = 필벌,\' \'선인 = 필상\'이라는 관념적인 도식으로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념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재단할 경우 세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 속에 신비롭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것도 됩니다. 다시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악인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고 의인이 부당하게 고통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이야말로 욥기가 강렬하게 추구하는 신앙의 본질,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신앙\'이 아닐까요? 이것은 인과응보라고 하는 인간의 윤리적 잣대가 아닌 하나님께서 스스로 움직이실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