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8/ 소뱔의 두번째 공박


욥기강해18/ 소발의 두 번째 공박 : 꿀꺽 삼킨 것은 모두 다 토해내리/욥20:1-29



본문 말씀은 소발이 욥에게 던진 두 번째 발언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이 욥과 설전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다가 소발이 끼여들었습니다. 소발은 나아마 사람으로서 \'어린 새\'라는 이름뜻을 가집니다. 엘리바스의 출신지인 데만은 남쪽, 빌닷의 고향인 수아는 동쪽 지역인 까닭에 소발의 출생지인 나아마는 북쪽 지역일 확률이 높습니다. 욥기 저자는 욥이 사방에서 온 현자들과 논쟁을 벌였다고 설정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발은 \'어린 새\'라는 이름뜻이 상징하듯이 셋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으며 매우 시건방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누구 말대로 그는 명문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며 현장에 함부로 적용하려고 달려드는 애송이와도 같습니다. 소발은 첫 번째 발언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욥을 악인으로 몰아 부치며 개전의 정을 보일만한 그 어떤 희망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도 마찬가지였는데 두 번째 바퀴의 논쟁에 들어가면서부터 욥을 아예 악인으로서 낙인찍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소발의 요점은 빌닷의 논리와 비슷하게 매우 단순합니다. \'악인 = 필연적 멸망 = 욥의 운명\'이라는 도식으로 밀어 부칩니다.

1. 욥의 비전을 반박하는 소발(20: 2-11)

자신의 무죄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욥의 발언을 듣고 있던 소발은 벌컥 화를 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으나, 네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모두 나를 모욕하는 말이다. 그러나 깨닫게 하는 영이 내게 대답할 말을 일러주었다\"(2-3절). 여기서 \'깨닫게 하는 영,\' 즉 \'슬기로운 마음\'은 소발이 선대로부터 전수받은 지혜와 지식, 교훈, 감수성, 등등을 의미합니다. 욥의 결백 주장은 다 깨닫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한 미련함에서부터 온 것임에 반해 자기는 지혜와 분별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이제 소발은 18장에서 살펴본 빌닷의 공박을 뒤이어 악인이 걷게 될 비참한 말로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소발은 욥이 19장에서 빌닷이 제시한 악인과 자기는 전혀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구속자에 대한 비전까지 품고 있는 것을 격퇴시키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소발은 \"네가 알지 못하느냐?\"라고 되 뇌이면서 과거로부터 전해내려 온 경험과 지혜의 대원리, 즉 악인의 번영은 잠시 잠깐이며 필경 망하고 만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소발이 강조하는 것은 악인과 관련된 일체의 것이 결국 소멸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5-9절을 보면 악인의 승전가는 잠시 잠깐 뿐이며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꿈같이 잊혀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벨탑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말씀이 6-7절에 나옵니다.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머리가 구름에 닿는 것 같아도, 마침내 그도 분토처럼 사라지고 말며, 그를 본 적이 있는 사람도 그 교만한 자가 그가 왜 안 보이느냐고 물으리라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이름을 날리기 위하여 하늘 꼭대기까지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교만한 사람들이 다 흩어져 똥처럼 사라지고 말았음을 상기시킵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혜를 돌아볼 때 악인은 필경 사라지며(7절), 흩어지며(8절), 마침내 기억에서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것(9절)이 소발의 확신입니다. 게다가 악인의 자녀들은 반드시 가난해져서 구걸할 수밖에 없게 되고 부당하게 착취한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10절).

11절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그의 몸에 한때는 젊음이 넘쳤어도, 그 젊음은 역시 그와 함께 먼지 속에 눕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이 뜯어보면 욥이 19: 25-27절에서 꿈꾼 구속자의 대망에 찬물을 끼얹는 의도가 다분히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특히 19: 26-27절에서 자기의 살갗이 다 문드러지고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하나님을 직접 뵙고야 말리라는 다부진 비전을 보였습니다. 소발은 이 희망을 뒤집는 말을 합니다. 욥과 같은 악인은 한 때 젊음을 자랑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2. 악인이 받게 될 유산(20: 12-29)

빌닷은 18: 4-21절에서 악인의 운명을 논할 때 주로 장소 개념, 즉 좁게는 장막, 넓게는 우주로부터의 추방을 강조했습니다. 소발도 악인의 필연적 패망이라는 기본 논조에는 동조하지만 매우 색다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음식과 재산 취득의 몫 혹 유산이라는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이것은 악인의 끝 모르는 탐욕을 상징하는 이미지이지요. 먼저 12-16절을 보세요. \"그가 혀로 악을 맛보니, 맛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악을 혀 밑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이 뱃속으로 내려가서는 쓴맛으로 변해 버렸다. 그것이 그의 몸 속에서 독사의 독이 되어 버렸다. 그 악한 자는 꿀꺽 삼킨 재물을 다 토해 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 재물을 그 악한 자의 입에서 꺼내어서 빼앗긴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신다. 악한 자가 삼킨 것은 독과도 같은 것, 독사에 물려 죽듯이 그 독으로 죽는다.\" 또한 18절을 보세요. \"그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도 못하고 되돌려보내며, 장사해서 얻은 재물을 마음대로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21절도 보세요. \"먹을 때에는 남기는 것 없이 모조리 먹어 치우지만, 그의 번영은 오래 가지 못한다.\" 23절도 보세요. \"그가 먹고 싶은 대로 먹게 놓아 두어라. 하나님이 그에게 맹렬한 진노를 퍼부으시며, 분노를 비처럼 쏟으실 것이다.\" 여기 보면 달콤한 맛, 뱃속, 쓴맛, 독, 토해냄, 입, 꿀꺽 삼킴, 먹음, 등등의 음식 섭취의 용어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인생을 하나의 식욕으로 본다면 악인은 욕심 사나워서 무엇이든지 꿀꺽꿀꺽 잘 삼키지만 결국 다 토해내야 하거나 그 삼킨 음식이 독이 되어 자기를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끝 모르는 탐욕은 반드시 착취한 만큼 되돌려주거나 완전 멸망으로 귀결된다는 주장이지요.

소발은 20-29절에서 악인의 탐욕이 어떤 패망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열거합니다. 26절을 보세요. \"그가 간직한 평생 모은 모든 재산이 삽시간에 없어지고, 풀무질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오르는 불길이 그를 삼킬 것이며, 그 불이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 사를 것이다.\" 28절도 보세요.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그 집의 모든 재산이 홍수에 쓸려가듯 다 쓸려갈 것이다.\" 결국 27절 말씀처럼 악인의 탐욕과 악행은 하늘이 그 죄악을 다 밝히 드러내며 땅이 고발해서 하나 남김 없이 다 소멸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결론이 29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몫이며, 하나님이 그의 것으로 정해 주신 유산이 될 것이다.\" 끝없는 탐욕으로 일그러진 악인이 받게 될 몫, 유산은 철저한 소멸과 결핍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20장에서 악인의 개인 윤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적인 차원까지 등장한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악인이 취득한 재산을 다 토해내야 하고 결국 완전 파산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9절을 보세요. \"이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기가 세우지도 않은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아, 여기에서 소발은 욥이 가난한 이웃에게도 악행을 범하는 아주 못된 사람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욥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든 저주와 비난은 욥을 겨냥하고 있음은 추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욥은 탐욕으로 가득차 아무리 가져도 도무지 만족을 모르며(20절), 결정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부당하게 착취했기에 지금의 고통을 응벌로서 받고 있다는 논리이지요.

소발의 논리는 빌닷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매우 선명합니다. 악인은 기필코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운명을 논할 때 흥미로운 차이는 빌닷이 주로 장소 이미지를 활용하여 악인이 도덕 질서가 운행하는 우주로부터 영구 추방되어 잊혀진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발은 악인이 주로 게걸스러운 식욕으로 상징되는 바 재산 취득의 무자비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결핍 혹은 파산이라는 유산을 받게되리라고 묘사하는데 있습니다. 더욱 더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의 단순 논리가 1: 10절에서 사탄이 제시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빌닷이 사용했던 장소 이미지가 여기에서는 \'욥과 그가 가진 집, 그리고 울타리\'와 연결되고 소발이 사용하는 식탐 이미지는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의 소유\'와 연결되지 않습니까? 결국 사탄의 참소대로 욥은 가진 모든 것을 상실하고 그 자신까지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사탄이 하나님께 요구한 내용 그대로를 빌닷과 소발이 악인의 운명이라는 명목으로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있는 셈인데, 욥은 두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의 완전 상실과 완전 결핍이라고 하는 악인의 이중적 최후를 맞고 있는 셈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소발은 빌닷 못지 않게 잔인하고 비열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악인의 운명 운운할 때에는 분명히 욥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욥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악인인 까닭에 악인에게 예정된 필연적 응보를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약 2: 16절에서 이웃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친구들은 말로 욥을 불편하게 만들고 벌거숭이 되어 벌벌 떨게 만들고 허기진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욥이야말로 악인의 예정된 행로대로 완전 망각과 완전 박탈의 말로를 걷고 있다고 몰아 부치는 것이지요.

물론 소발의 말이 옳은 부분도 있습니다. 지나친 탐욕에 사로잡혀 이웃을 괴롭히는 악인은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우주의 한 법칙입니다. 끝 모르는 탐욕으로 가난한 이웃을 착취하는 불의한 세력들에게 이와 같은 윤리 법칙은 분명히 경종을 울려 이 세상을 보다 정의로운 곳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오늘 망각과 궁핍으로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다 어제 지은 죄로 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이 경우에 해당되며 하나님이 아시고 욥 자신의 양심이 압니다. 이렇게 빌닷이나 소발의 단순논리를 이 세상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할 경우, 가난하고 병들고 망각되고 박탈당한 사람들은 다 지은 죄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이 됩니다. 역으로 잘살고 건강하고 유명해서 오래 기억되고 온갖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선을 쌓았기에 보상을 받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빌닷과 소발의 현세 응보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질 경우 기득권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론적인 자기 합리화와 체제보장을, 가난하고 병들어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에게는 죄책감과 열패감, 자포자기를 심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다루시는 모양은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분이시기에 훨씬 더 신비롭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인과율에 얽매여 있는 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허물이 많고 자격 없어도 값없이 은총을 베푸시는 분입니다.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악인도 오래 참으셔서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훨씬 더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