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7/ 빌닷의 두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17/ 빌닷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욥19:1-29



빌닷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인 19장은 3장 이후 지금까지 욥이 해온 그 어떤 대답들보다도 짧습니다. 그러나 19장은 흔히 욥기의 절정이라고 일컬어집니다. 헨델의 저 유명한 메시아 제 3부의 주제로서 뿐만 아니라 촬스 웨슬리가 작사한 우리말 찬송 16장 \"내 주는 살아 계시고\"의 주제가 모두 19: 25-27절로부터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하게 암시한다는 사실 때문에 욥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신앙 고백이 빌닷의 과격하기 짝이 없는 발언 뒤에 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18장에서 빌닷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도덕적으로 균형잡힌 세계로부터 악인은 영구 추방당할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습니다. 악인은 단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일체의 기억과 흔적, 후손마저도 단절되는 완전멸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욥의 이 구속자에 대한 희망은 이와 같이 빌닷의 참혹한 공박에 대한 대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 욥의 원수가 되어 핍박하시는 하나님(19: 2-12)

빌닷의 가슴 후비는 말을 들은 욥은 2-3절에서 이렇게 대응합니다. \"네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며, 어느 때까지 말로써 나를 산산조각을 내려느냐? 너희가 나를 모욕한 것이 이미 수십 번이거늘, 그렇게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럽지도 않느냐?\" 개역 성경에는 10번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주 반복해서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빌닷을 비롯한 친구들의 말이 욥의 심장에 비수를 꼽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6-12절에서 빌닷이 제시한 논리를 조목조목 뒤집어 반박합니다. 18장에서 빌닷은 욥이 악인인 까닭에 자기가 만든 그물에 빠지고 함정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욥은 거꾸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물에 얽어 넣으셨다고 주장합니다. 6절을 보세요.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욥의 영광을 거두어 가시고 온 몸을 두들겨 패시며, 나무 뿌리를 뽑듯이 일체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9-10절). 또한 하나님은 자기를 적으로 여기셔서 자기를 치려고 군대를 보내시며 자기를 포위하신다는 것입니다(11-12절). 여기서 욥은 자신이 고통을 겪는 것이 빌닷이 주장한 것처럼 자신이 악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악인의 운명을 자초한 것이 아님을 반박합니다. 이 모든 고통의 진원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지요.

2. 사방으로 고립된 욥의 절망적인 처지(19: 13-22)

이제 욥을 절망스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인간들까지도 이러한 적대적 음모에 총 합세해서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다고 절규합니다. 욥은 하늘과 땅, 동서남북 사방에서 총체적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3-19절을 보세요. 욥과 가까운 사이부터 욥을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먼저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부터 욥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13절).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도 욥을 버렸습니다(14절). 아내조차도 심한 악취를 풍기며 병을 앓고 있는 욥이 살아 숨쉬는 것을 버거워하며 친형제들조차 역겨워합니다(17절). 친한 친구들도 욥을 꺼려하며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욥에게서 일제히 등을 돌립니다(19절).

그런데 더욱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동안 지속되어 오던 일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뒤집혀버리는 전복의 경험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15-16절을 보세요. \"내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와 내 여종들까지도 나를 낯선 사람으로 대하니, 그들의 눈에,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을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니, 내가 그에게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고.\" 나그네와 여종들이 욥을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데 거꾸로 욥을 나그네처럼 대하며 주인과 종의 관계가 역전되어서 오히려 욥이 종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18절). 연장자인 자기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그동안 누려왔던 관계가 완전히 전복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욥의 재앙은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 단지 육체뿐만 아니라 심신이 다 고통받고 있으며, 더욱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일체의 관계성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당하는 사회적 죽음입니다. 그리하여 욥의 비극적 상황은 20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 잇꺼풀, 즉 잇몸이라는 말은 영어로 \'the skin of teeth,\' 잇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이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간신히 숨만 헐떡거리고 있는 한 인간의 비참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지요.

이제 이같이 총체적인 소외상황 속에서 욥은 빌닷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호소합니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21-22절). 욥은 친구들이 도와주기는커녕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자기를 심문하고 정죄하는 태도에 또 한 차례 깊이 절망합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도 핍박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믿고 의지하던 가족들, 친척들, 지인들, 친구들, 심지어 나그네와 종들, 어린 것들까지 욥을 총체적으로 따돌리는 판에 이제 욥이 기댈 수 있는 구세주는 어디에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욥의 놀라운 구속자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욥이 완전히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을 때 구속자에 대한 찬란한 희망을 떠올리게 됩니다. 욥이 최고조의 믿음에까지 올라간 것은 이렇게 처절한 밑바닥체험에서부터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구속자에 대한 신앙고백(19: 23-29)

이제 우리는 욥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완전히 버림을 받은 욥은 참 신기한 고백을 합니다. 25-27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구원자, 즉 구속자에 대한 희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처럼 \"폭력이다!\" 하고 부르짖어도,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하늘도 땅도 다 침묵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의 핍박과 공격은 더해져만 갔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욥은 또다시 하나님이 구속자 되셔서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비전을 봅니다! 살갗이 다 뭉그러지고 뼈가 다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지요. 욥의 그 희망의 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애간장이 다 녹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욥은 본연의 믿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사방으로 포위당해서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기막힌 상황 속에서 자기의 희망은 역시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구속자라는 말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해서 이 구절의 말씀을 흔히 기독교의 부활 신앙과 연관시켜서 해석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진보적인 학자들이 대개 동의하는 요점은 구속자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욥기 자체의 문맥과 배경을 무시한 채 기독교적 부활 신앙의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덮어씌우기 해석이 될 수 있다며 경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논란을 떠나서 저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이 구절은 얼마든지 부활 신앙의 예표(豫表)로서 해석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세 친구들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주의자와 일맥상통하고 욥은 신기하게도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말씀을 욥이 극도의 신고 끝에, 다시 말해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한 인생의 밑바닥에 이르게 되었을 때 믿음의 절정, 즉 자기를 대속해 주실 구속자에 대한 궁극적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기에 부활 신앙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렇다면 구속자는 도대체 무엇을 뜻할까요? 구속자는 히브리말로 \"go\'el\"인데 경제적 법적 용어입니다. 고엘은 어떤 사람이 빚을 지거나 이로 인해 종살이를 할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토지나 몸값을 주고 건져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레 25: 47-9; 룻 2: 20; 렘 32: 6 이하 참고). 자유와 생명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을 가장 가까운 혈족이 도와주는 속량제도를 일컫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고엘은 반드시 \'친족 구속자\'(kin redeemer)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제 이 친족 구속자의 개념을 하나님께 확대시킬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셔서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주십니다(출 6: 6; 시 72: 14; 사 41: 14; 43: 14; 44: 24 참고). 결국 구속자는 내가 종이 되거나 죽을 지경에 처할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내 대신 몸값을 주고 나를 구출해내는 사람입니다. 욥은 아무 죄도 없이 죽게 되었을 때,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눈을 들어 자기를 이 위기로부터 속량해 주실 구속자를 대망합니다. 불의와 소외와 절망 속에 그냥 내팽개쳐두시지 않고 구속해주실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욥은 죽더라도 간장이 다 녹더라도 그 구속자 하나님을 반드시 보고야 말리라고 다짐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욥의 마음 속에 구속자에 대한 신앙에 이르기까지 삼단계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9: 33절의 \'중재자\' 개념으로부터 시작해서, 16: 19-21절의 \'증인\' 혹은 \'변호자\'의 개념을 거쳐, 마침내 19: 25의 \'구속자\' 개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친구들이 들어줄 수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따지기로 작정합니다. 마치 법정에서 재판을 걸 듯이 자기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싶은 데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그 중재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 사정을 알아주신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욥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속사정을 증언해줄 수 있는 증인이자 변호인이 필요했는데 그 역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욥은 자신을 이 불의한 죽음의 위기로부터 건져내실 고엘, 즉 구속자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결코 무고한 고통을 당하는 욥을 방기하시지 않고 반드시 건져내시고야 말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욥의 믿음과 희망은 \'중재자\'→\'증인\'/\'변호인\'→\'구속자\' 순으로 단계적으로 성장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지금까지 욥기를 읽어오면서 한 가지 곤혹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의 이중성과 모순입니다. 19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시는 원수라고 한탄하다가, 갑자기 자기를 이 위기에서 건져내실 고엘, 즉 구속자라고 또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시는 동시에 이 고통으로부터 구해내실 속량주가 되실 수 있을까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인 동시에 친구, 즉 중재자요 증인이요 구속자가 되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욥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욥의 결백을 입증하는 변호자가 되실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이중성의 물음 언저리에는 욥의 위대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통의 궁극적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실히 안 동시에 자신의 무죄를 다 밝혀내고 최종적으로 이 고통으로부터 구출해내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양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거꾸로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찬 욥의 상황적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욥은 현재를 바라보면 고통 때문에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겪는 고통의 부당성을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합니다. 그러다가 이 지긋지긋한 고난으로부터 빠져나올 출구를 찾아보니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소망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욥의 영적 갈등과 투쟁은 욥으로 하여금 점점 더 성숙한 믿음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결국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핍박자이신 동시에 구속자라는 사실은 고통의 기원과 종결이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굳센 신앙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이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믿음은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도 있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까닭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