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5/ 엘리바스의 두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15/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 /욥17:6-16


오늘 본문은 비교적 짧습니다. 부흥회 이틀 간을 빼고 38일 동안의 분량으로 나누고 안배하다보니 어떤 날은 본문이 아주 길고 또 오늘 같은 날은 아주 짧습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여기에 욥기의 매우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욥의 죽음에 대한 바램이 나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욥기는 아직 내세신앙이 생겨나기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든 상황이 종결되는 끝으로 봅니다. 욥의 경우 현재의 고난이 극심하므로 자주 죽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은 욥이 절망스런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인식됩니다. 창조와 출생은 이미 이루어졌기에 자신이 손을 쓸 수가 없지만 죽음은 아직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죽음은 욥이라는 존재 전체의 종말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 당하는 부당한 고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기 때문에 욥의 탄식에 여러 차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3: 11-19; 6: 8-13; 7: 15-16; 10: 18-22; 14: 13-15; 17: 11-16). 여기에서 죽음에의 희망이 자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냥 탄식의 중요한 주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욥이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끝장내고자하는 자살 의도에서가 아니라 고난이 어서 속히 끝났으면 하는 염원의 표현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욥이 죽음을 희망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다시 절망스러운 상황으로(17: 6-10)

욥은 이제 냉정하게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니 만신창이가 된 모습입니다. 7-9절을 보세요. \"근심 때문에, 눈이 멀고 팔과 다리도 그림자처럼 야위어졌다. 정직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며, 무죄하다고 자칭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불경스럽다고 규탄하는구나. 자칭 신분이 높다는 자들은, 더욱더 자기들이 옳다고 우기는구나.\" 이렇게 세 친구들로 대표되는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정직하고 무죄하다고 우기면서 정말 정직하고 무죄한 욥 자신을 불경하다고 몰아 부친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욥은 이런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자기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지혜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진짜 정직하고 무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자기라는 주장이지요. 그렇다면 욥에게 남은 희망은 무엇입니까?

2. 다시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른 스올(17: 11-16)

욥에게 희망은 과거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로부터 오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 보면 욥의 날이 이미 지나갔고, 미래에 펼칠 욥의 계획, 마음의 소원도 다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포기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12절을 보세요. \"내 친구들의 말이 밤이 대낮이 된다 하지만, 밝아온다 하지만, 내가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친구들은 고통의 밤이 지나가고 밝은 대낮이 찾아온다고 말하지만 욥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현실에 대한 상심이 컸으면 이렇게 까지 절망할까요?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는데 욥의 경우 확실히 옳습니다. 자, 그렇다면 욥에게 희망의 빛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밝아오는 것일까요?

13-15절을 보세요. \"내 유일한 희망은,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로 가는 것이다. 거기 어둠 속에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뿐이다. 나는 무덤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겠다. 내 주검을 파먹는 구더기를 \'내 어머니, 내 누이들\'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더 있는가? 내가 희망을 둘 곳이 달리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욥은 스올, 즉 사자가 내려가는 지하세계를 한 가닥 희망으로 떠올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스올을 욥은 하나의 가정(home)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자리,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 이런 표현들이 가정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또한 여기 구덩이, 즉 무덤과 구더기는 이와 같은 가족 개념과 연합되어 죽은 사람을 절대 무(無)로 돌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욥이 죽어서 아버지로 표현된 무덤 구덩이의 자식이 된다는 것과, 욥의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들은 욥의 어머니 자매처럼 된다는 것은 욥이 죽어서 흙이나 구더기와 같이 절대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이와 같은 한 가닥 희망마저도 욥이 죽어 스올로 내려가면 죽음과 함께 구덩이에 매장되어 구더기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희망은 산 자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죽은 자는 희망까지도 \'해당 무\'가 되기 때문이지요.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실레노스라는 사람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요, 일단 태어났다면 되도록 빨리 죽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고난 속에 처한 사람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절망감이지요. 욥에게서도 죽음에로의 바램은 현재의 부당한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로서 인식됩니다. 그만큼 절망스러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치는 하나의 해방구로서 죽음과 스올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욥은 결코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 아닙니다. 다만 기가 막힌 고난의 상황에 대해서 탄식하다보니 하나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도 너무나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 \"내 죽으면 이 고생 다 끝나지.\"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죽음은 불가해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탄식할 때 하나의 탈출구로서 흔히 그 기능을 하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죽음에로의 바램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망 선고를 받은 임종 환자들은 극심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가 죽을 리가 없다며 죽음의 현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고립\'의 단계를 시작으로 해서 \'분노와 거부의 단계\'로 넘어 갑니다. 그런 뒤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이제부터는 선하게 살고 싶으니 좀 더 살게 해달라고 신과 타협하는 \'거래의 단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게 될 때 \'침울\'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욥이 자신의 고통을 탄식하며 죽음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욥이 아직도 \'분노와 거부의 단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 싶습니다. 흥미롭게도 욥의 탄식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죽음이 오늘 봉독한 17: 11-16절을 끝으로 자취를 감춥니다. 이것은 욥이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는 않는지요?

이제 욥과 같이 처절한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첫째, \"차라리 내 죽으면 이 고통 당하지 않지.\" 하면서 죽음이라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 고난에 찬 현실로부터 피해 가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 듯이 보입니다. 둘째, \"누구나 다 이런 고통 당하지 나라고 예외인가?\" 하면서 포기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셋째, 고통의 의미를 물으면서 고통을 적극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은 참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욥의 경우에도 친구들의 말도 들어보고 탄식하고 절규를 해보아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에 죽음에로까지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피해가든, 포기하든, 뛰어넘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욥이 절망하듯이 죽음으로 고통이 끝난다는 발상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고 지나친 우려입니다. 그 전에 고통은 종결될 것입니다!

끝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하나 가르쳐 드립니다. \"죽음을 기억하자.\"라는 의미인데 아주 엄격하기로 소문난 시토 수도회에서 인사말 대신 쓰도록 한 말입니다. 중세 시대의 성화를 보면 토굴 속에서 해골을 앞에 두고 관상 기도에 빠진 수도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유럽의 성당 가운데에는 제단 앞 지하에 망자의 해골과 뼈를 차곡차곡 쌓아두어 위에서 내려다보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너의 죽음도 기억하라는 뜻이지요. 욥은 죽어서 들어가는 무덤이 잠자리를 펴고 눕는 것으로, 구덩이가 자기 아버지요, 자기 시신을 파먹는 구더기를 자기 어머니요 자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죽음에 친숙하다는 표시이지요.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닌 나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