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4/ 엘리바스의 두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14/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 /욥16:1-17:5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가집니다. 처음에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욥을 위로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적대자로 바뀌어져갔습니다. 더 이상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심판자가 되어 갔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만 종합해봐도 고난은 죄의 결과로서 온다는 원리가 이들에게 하나의 도그마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죄없는 사람이 고난 당하도록 방치하실 수 없습니다. 욥이 오늘 재앙을 당하는 것은 반드시 어제 욥이 지은 죄의 결과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욥에게 줄기차게 알리고 가르치려고 한다는 사실에서 이들은 예언자들이나 파수꾼들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겔 3: 17). 친구들은 욥으로 하여금 죄지어서 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회개하도록 만들어서 예전의 경건자, 행복자로 되돌아가도록 외쳐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자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언자적이요 파수꾼적인 사명을 수행하다보니 이들은 어느새 위로자의 모습은 잃어버리고 심문자와 심판자의 모습으로 탈바꿈해갔습니다. 욥이 더욱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제 넘는 책망과 훈계로 일관하는 친구들에 대한 저항입니다.

1.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 1-6)

3장 이후부터 전개되어온 담화를 살펴보면 욥의 응답은 친구들에게 먼저 한 뒤, 하나님께 호소하는 식으로 끝을 맺어왔습니다(6: 7-21; 10: 2-22; 13: 20-14: 22). 그런데 16-17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은 조금 다릅니다. 친구들에 대하여 간간이 언급하는 가운데 독백으로 결론을 맺기 전(17: 11-16), 주로 하나님께 간략히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공모자가 되어서 자기의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생각합니다. 2-3절을 보세요.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욥이 죄를 지어서 이 고난을 당하니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라는 친구들의 말이 견딜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들은 개역 성경에서는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 개역 개정판에서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 이런 말을 \'oxymoron,\' 즉 모순어법이라고 합니다. 서로 정반대 되는 단어를 결합시켜 삶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지적하는 언어형식이지요. 예컨대 \'침묵의 소리,\' \'깨끗한 혼란,\' \'지독한 친절,\' \'창조적 파괴,\' \'똑똑한 바보,\' 등등을 들 수 있습니다.

노년의 뉴턴이 어느 날 난로 앞에 앉아있었는데 불이 너무 뜨거워 하인을 불러 벌겋게 단 석탄을 꺼내도록 했습니다. 이 때 하인 왈, \"석탄을 꺼내는 대신 왜 의자를 난로에서 조금만 옮겨 떨어져 않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또 뉴턴은 크고 작은 고양이 두 마리를 길렀는데 서재에 들어오려고 서로 다투는 모양을 보고서는 자기 딴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냈습니다. 문짝에다가 큰 놈을 위해서는 큰 구멍을, 작은 놈을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상식으로 볼 때 큰 고양이가 큰 구멍으로만, 작은 고양이가 작은 구멍으로만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 경우 뉴턴을 \'우둔한 천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모순어법은 대립적인 사실이나 상반된 생각을 상호 모순되게 표현함으로서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언어표현법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갖가지 말을 쏟아 놓는데 실상은 다 재난만 안겨주는 말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입에 발린 말로 욥의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팠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16: 6절 말씀은 욥의 참담한 처지를 유감 없이 드러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고통 줄어들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보아도 이 아픔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아, 얼마나 재치 있는 표현인지요!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고함을 질러봐도 입을 꼭 다물고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어가도 아픔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웃어봐도 울어봐도 소리쳐봐도 입을 꾹 다물어봐도 비수처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은 영영 사라지지 않습니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지요.

2. 하늘에 계신 증인(16: 7-17: 5)

이 부분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 사정없이 다루시는 원수라고 묘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욥은 친구들이 이 처절한 고통에 대해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8-10절을 보세요. \"주님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님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를 치신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지은 죄로 내가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분노하시고, 나를 미워하시며, 내게 이를 가시며, 내 원수가 되셔서, 살기 찬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시니, 사람들도 나를 경멸하는구나. 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16: 12-14절을 보면 군사적인 용어까지 동원해가면서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가혹하게 공격하시는 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욥을 과녁 삼아 사방에서 화살을 날리시며 욥을 갈기갈기 찢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집중포화 한 가운데에서도 욥은 여전히 자신의 결백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나는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내 기도는 언제나 진실하였다\"(16: 17). 아무 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제 욥은 6: 18-22절에서 친구들이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부당한 고통을 하나님께 증언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무죄 소송을 벌일 때 친구들이 자기가 지금 아무 잘못한 것이 없이 견디기 어렵고 부조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양심껏 증언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친구들은 욥의 기대를 저버리고 거꾸로 욥이 지은 죄에 응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코너로 몹니다. 그리하여 욥은 땅이 이 억울한 고통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정의를 찾는 자신의 부르짖음이 허공에 산산조각 흩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절규합니다(16: 22).

20절에 보면 친구들이 자기를 조롱하니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욥의 억울한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으니 욥이 호소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절과 21절을 보세요.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변호하듯이, 그가 하나님께 내 사정을 아뢴다.\" 여기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당하게 핍박하시는 원수같은 하나님인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변호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원수인 동시에 자신의 무죄함을 옹호해주시는 벗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읽을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증언하고 변호해주십니다. 욥도 지상에서 자기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결백을 변호해 줄 증인을 찾지만 조롱만 돌아올 뿐 찾을 수 없습니다. 결국 17: 3의 말씀처럼 욥은 자신의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한 분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이 결국 주님께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께서 친구들의 마음을 마비시키셔서 다시는 욥에게 우쭐대지 못하게 해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17: 5절에 흥미로운 격언이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 보증은 경제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손해 보지 않도록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들이 욥의 무고한 고난에 대해서 보증 서기를 꺼려하는 이유도 혹시 부주의하게 끼어 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친구들이 마치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는 사람들처럼 손해 보지 않으려고 욥의 무죄함을 증언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증 삼게 될 때 친구들의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처신, 즉 손해 보지 않기 위하여 욥의 보증이 되지 않으려는 행위는 그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말은 욥이 친구들이 \'돌팔이 의사들\'(13: 4)과 마찬가지라고 힐난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이 말 저 말 내뱉다가 실제로는 더 큰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은 없는지요. 어설픈 지식과 쓸데없는 우월감으로 고통 당하는 이웃을 심문하고 정죄한 적은 없는지요. 그저 겸손히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따뜻하게 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은 다시 지식과 실천, 이론과 경험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비슷한 경험을 당해본 사람만이 상대방의 아픔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실제적 경험이 아닌 인과율이라는 낡은 도그마,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말을 걸기 때문에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그토록 목말라 찾는 증인, 변호자는 어디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대변해 줄 증인, 변호자는 또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증인이요, 변호자이십니다. 예수님도 아무 죄도 없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했지만, 결국 그 하나님이 당신의 무죄성을 변호해주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욥과 같이 부조리한 고통을 직접 겪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억울한 일을 만나 하염없는 눈물을 뿌릴 때 홀로 임마누엘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셔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르트르는 지옥이 \"서로 싫은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할 곳\"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있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여러분의 시간과 공간을 천국으로 만들어 보시지 않으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