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13/ 엘리바스의 두 번째 공박/욥15:1-35 15-21장까지는 세 친구들과 욥 사이의 둘째 마당의 설전이 나옵니다. 3-14장까지의 첫 바퀴 논쟁이 끝난 뒤 다시 1번 타자 엘리바스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바스는 그 이름이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데만 출신으로서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입니다. 엘리바스는 세 친구들 중에 제일 연배가 높았으며 학식도 있고 그런 대로 점잖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욥이 첫 번째 마당의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예의 그 온유함을 잃고 점점 공세적이고 정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논리는 4-5장에서 피력한 첫 번째 발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 당시 두루 통용되었던 도덕적 인과율을 욥의 경우에도 줄기차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은 도덕 질서가 자리를 잘 잡고 있기에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선인은 보상을, 악인은 응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지요. 엘리바스는 이러한 대원칙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세상에 척척 작동한다고 확신하기에 욥의 결백성에 대한 변명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반드시 자신의 죄악을 하나님께 이실직고(以實直告)하여 용서를 빌어야만 합니다. 그 것 만이 욥이 살길입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이 현재 재난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과거에 죄악을 심었음에 틀림없다는 단정적인 논리를 전개해나갑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맹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없는 사람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와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수받은 인과응보의 신학논리로 \"죄없는 사람도 고난 당할 수 있고 죄있는 사람도 번성할 수 있다.\"는 너무도 엄연한 경험적 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내리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마 5: 45 참조). 이러한 태도야말로 교조주의적, 율법주의적이며 창기와 세리같은 중죄인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식탁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은총과 사랑에 정면 배치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바스의 논리에서 이러한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욥을 불경건하다고 공박하는 엘리바스(15: 1-16) 욥은 신학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 체험으로부터 말했습니다. 무죄한 사람도 재앙을 만날 수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친구들과 하나님께 힘써 변증했습니다. 그러나 온화한 것처럼 보였던 엘리바스도 이렇게 집요하게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따지는 욥을 향하여 불경건하다고 공격합니다. 4-5절을 보세요. \"정말 너야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뉘우치며 기도하는 일조차도 팽개쳐 버리는구나. 네 죄가 네 입을 부추겨서, 그 혀로 간사한 말만 골라서 하게 한다.\" 욥이 하나님을 위협하여 경건성 그 자체를 손상시킨다는 비난이지요. 이제 엘리바스는 욥이 주장하는 자기만의 내밀한 지혜에 대해서도 공박합니다. 7-9절을 보세요. \"네가 맨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기라도 하며, 산보다 먼저 생겨난 존재라도 되느냐? 네가 하나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하였느냐? 어찌하여 너만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느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너 혼자만 알고 있기라도 하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그 무엇을 너 혼자만 깨닫기라도 하였다는 말이냐?\" 이것은 12: 2-6절에서 욥이 친구들이 마치 지혜를 전세라도 낸 것처럼 구는 것을 반박한 내용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 때에는 욥이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들만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힐난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엘리바스가 욥이 지혜있는 척한다고 공격의 날을 세웁니다. 나란히 달리는 철도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양쪽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더 재미있는 것은 10절에 보면 욥이 마치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난 사람처럼 구는데 자기들 가운데에는 욥보다 훨씬 나이가 더 많은 머리 센 사람도 있고 욥의 아버지보다 더 연장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지혜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요. 엘리바스는 이제 나이까지 들고나와 욥이 지혜있는 척 하는 것을 꾸짖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서 엘리바스는 욥이 씻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예 단언하고 있습니다. 14-16절을 보세요.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마저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으신다. 그분 눈에는 푸른 하늘도 깨끗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하물며 구역질 나도록 부패하여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여기 보세요.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의 무죄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을 듣고서는 천사들도 정결해지기 어려운데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말합니다. 이미 엘리바스는 4: 17에서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없다고 주장했었는데 욥의 죄있음을 물고늘어지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이 진리를 힘써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부인한 것은 자신의 태생적 연약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보편 타당하게 지니고 있는 원죄성에는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짓는 윤리적 죄, 즉 자범죄가 문제입니다. 적어도 욥이 100% 확신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지은 죄, 즉 자범죄에 비하여 그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불균형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번 엘리바스와 욥은 대화의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어긋나고 있습니다. 2. 욥과 같은 악인의 운명(15: 17-35) 여기에서 엘리바스는 인과응보론이라는 정통 신학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아 욥을 죄인으로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세요. \"이것은 모두 그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주먹을 휘두르고, 전능하신 분을 우습게 여긴 탓이 아니겠느냐? 전능하신 분께 거만하게 달려들고, 방패를 앞세우고 그분께 덤빈 탓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함부로 종주먹질을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가 대대손손 현자로부터 전수받아온 한 점 오류도 없는 정통 신학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17-18절).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와 같은 악인들 중에는 욥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받는 고통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20-24절, 27-35절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들리는 소식이라곤 다 두려운 소식뿐이고 항상 칼이 목숨을 노리고 더 이상 앞날의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악인은 사는 집이 폐가가 되며 더 이상 부자가 될 수 없으며 가지가 불에 탄 나무처럼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가지가 불에 탄 나무,\' \'꽃이 바람에 날려 사라진 나무,\' \'마른 나뭇가지,\' \'익지도 않은 포도,\' \'꽃이 다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올리브 나무\' 등의 이미지를 통하여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회화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렇게 엘리바스는 욥이 악인이기 때문에 악인이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고통을 지금 다 받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엘리바스의 말은 참 화가 나게 만듭니다. 가족도 잃고 재산도 잃고 건강마저 잃어서 빈사 상태에 빠진 사람을 이렇게 까지 코너로 몰 수 있나, 자괴감이 듭니다. 엘리바스의 인과응보론이 결코 틀린 이론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맞아떨어지는 우주의 한 법칙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심연 속에 계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우주도 인과율로만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이론이 비록 옳다고 할지라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욥은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생각하고 엘리바스를 비롯한 세 친구들은 전통과 교리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 신학이 고난당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하나, 오늘 기막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는 그 반대편에 있는 논리, 즉 오늘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은 다 선을 쌓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100%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교조주의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경우 세상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 경험은 이와 같이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도덕적 질서를 부인하기 때문이지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실패한 사람, 등등, 주변으로 밀려난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나 당신 조상이 지은 죄로 인해 이 고통을 당한다고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부자,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 등등, 중심부에서 떵떵거리는 사람들을 당신이 과거에 선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의 복락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도 항상 진실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와 비슷하고 욥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썩 닮은 것처럼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죄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한다고 몰아 부치는 세 친구들이나 과거의 전통을 따지며 현실의 모든 고통스런 경험을 율법이라는 좁은 문자 속에 가두어 해석하고 심판하는 율법주의자는 공히 깊은 고통의 나락에 빠져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