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12/ 소발의 첫번째 공박에대한 욥의 응답

욥기강해12/ 소발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응답(III) /욥13:20-14:22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욥은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들고 갑니다. 하나 남은 목숨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겠다고 다짐합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친구들이 아닌, 이 고난의 궁극적 원인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직접 따지겠다는 것이지요. 본문 말씀은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속사정을 토로하는 기도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감싸주시던 모든 울타리가 쓰러졌고 일체의 희망이 사라진 현실을 고발하는 동시에 회복과 갱신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묻고 있습니다.

1. 욥의 두 가지 기도(13: 20-14: 6)

욥은 하나님과 다투기 전에 사전의 안전보장 형태로서의 두 가지 기도를 주님께 드립니다. 21절을 보세요. \"나를 치시는 그 손을 거두어 주시고, 제발, 내가 이렇게 두려워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토로하려면 건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고 극한 고난에 빠진 자기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야 하며 두려움에 빠진 자기를 건져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따지겠다는 태도가 결코 용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두려움도 함께 섞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와 더불어 욥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13: 23절을 보세요.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면 도대체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물음을 신학적으로는 부당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따진다는 뜻에서의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릅니다.

욥이 친구들을 제치고 하나님께 직접 따지게 된 동기는 자신의 결백성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자신이 지은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부당한 고통이라고 하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욥은 자신이 태생적으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천사와 달리 완벽하지 못한, 그리하여 피조물로서 숙명적으로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태생적 연약함까지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허물이 있음을 자인합니다(7: 21; 13: 26 참조).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이 이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요점은 욥이 당하는 고난이 자기가 지은 죄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대칭적인 고난이라는 사실이지요! 그 당시 보편적으로 통용되었던 도덕적 인과율에 비추어보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경건하고 의롭게 산다고 자부하던 구태여 욥만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과도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욥은 \"이게 아니다!\"라는 확신만 더 해 갔으며 마음 깊은 곳에 반발심만 커져갔습니다. 이렇게 욥이 하나님 앞에 무죄를 주장할 때 인간의 선천적 한계성에서부터 오는 원죄성까지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백한 욥을 지금 어떻게 대하십니까? 13: 25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욥을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대하시고 \'마른 지푸라기\'같이 욥을 공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줄곧 자기를 위협하는 원수처럼 대하신다는 것이지요. 또한 28절을 보세요. 욥은 하나님 앞에 \'썩은 물건\'과도 같고 \'좀 먹은 의복\'과도 같다고 탄식합니다. 욥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조사하시더니만 마침내 쓰레기처럼 대하신다는 푸념이지요. 또한 14: 2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욥을 \'시드는 꽃\'같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여기십니다. \'낙엽,\' \'마른 지푸라기,\' \'썩은 물건,\' \'좀 먹은 의복,\' \'시들어버린 꽃,\' \'사라지는 그림자,\' 등의 이미지들은 하나님에 의해 저 밑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진 욥의 처참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이와 같이 막다른 골목에 까지 내몰린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피력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 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안식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2. 욥이 꿈꾸는 한 줄기 희망(14: 7-22)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욥은 그러나 이제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14: 7-9절에서 욥은 나무의 경우를 희망의 본보기로 들고 있습니다.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저자가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세계에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나무도 찍혀서 다 죽게 생겼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린 가지를 뻗어 물기운만 빨아들일 수 있다면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여도 다시 싹이 트고 가지를 내어 살아납니다. 물기운만 있으면! 여기서 욥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마침내 목숨까지도 깜빡깜빡 기울어 가는 자신의 운명 앞에 수액의 영양분으로 다시 소생하는 나무 이미지에 희망을 겁니다.

아, 그러나 인간은 나무와 다릅니다! 여기에 욥의 희망은 다시 사그라지기 시작합니다. 14: 10-12절을 보세요. \"그러나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한 번 죽으면 사라지게 되어 있고,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처럼,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사람도 죽습니다. 죽었다 하면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늘이 없어지면 없어질까, 죽은 사람이 눈을 뜨지는 못합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나무는 수액을 통해 잘도 살아나는데 인간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한번 죽으면 다시 살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욥은 다시 직시합니다. 나무에게는 수액이 생명을 줄 수 있지만 인간의 경우 일단 죽은 다음에는 물이 말라버린 강처럼, 바닥이 훤히 드러난 바닥처럼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생명의 물이 다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설령 하늘이 없어진다 해도 죽은 사람은 소생할 방도는 없다! 자, 그렇다면 죽음에 처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요?

욥기에서 죽음은 창조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주제를 이룹니다. 창조가 존재의 출발점이라면 죽음은 존재의 귀결점이 되는 까닭에 욥이 탄식할 때마다 이 두 축을 왔다 갔다 합니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상황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으로서 욥은 현재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만사가 끝장나는 인간에게 희망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욥은 스올에로의 은닉을 꿈꿉니다. \'스올,\' 다른 말로 음부(陰府)는 구약에서만 65회나 사용되었는데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는 지하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스올의 개념이 나중에 신약에 가서는 무저갱(無底坑)과 지옥의 개념으로 발전해나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스올은 선악에 따른 형벌과는 무관한 사자(死者)의 대기 장소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칠 때까지 스올에 숨어 들어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욥의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지긋지긋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스올에 숨어 있도록 배려하시는, 그런 분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희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격과 진노가 멎을 그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스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욥은 스올에 숨어 있으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자신을 다시 기억하여 회복하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기억하시는 날 욥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될 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스올에서의 은닉에 희미한 기대를 겁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4: 13-15절을 보세요. \"차라리 나를 스올에 감추어 두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님의 진노가 가실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숨겨 주시고, 기한을 정해 두셨다가 뒷날에 다시 기억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아무리 대장부라 하더라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좋은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이 고난의 때가 지나가기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면,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손수 지으신 나를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스올에 있는 욥을 다시 기억하시는 날 14: 17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욥의 허물을 자루에 넣어 봉하시고 잘못을 덮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다시 한번 냉엄한 현실로 돌아올 때 무참하게 꺾이고 맙니다. 14: 18-20절에 보면 주님은 마치 \"산이 무너져 내리고, 큰 바위조차 제자리에서 밀려나듯이, 물이 바위를 굴려 내고 폭우가 온 세상 먼지를 급류로 씻어 내듯이,\" 연약한 자신의 희망도 그렇게 사정없이 끊으신다고 탄식합니다. 물론 희망도 하나의 상상적인 가정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희망의 사라짐 역시 상상 속에서 이렇게 덧없이 허물어져 갑니다.

3. 본문 말씀이 주는 교훈

욥이 극심한 고난의 현실 앞에서 스올에 한 가닥 기대를 건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실이 너무 고달파서 나온 심리적 도피주의로 쉽게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묵시록을 보면 현재 부당하게 고통 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종말의 날에 주어지는 보상이 약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욥기는 묵시 문학의 발전 과정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오늘 우리가 이유를 모르는 부당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허용하실 뿐, 의의 최후 승리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계 22: 11-12절은 말씀합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우리는 부조리한 고난을 당할 때마다 의의 최후 승리가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나무가 비록 찍혀 죽어가더라도 수액만 빨아들이면 움이 트고 잔가지가 돋아나 다시 소생하듯이 고난 당하는 우리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 고난은 결국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