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장
출애굽기 1장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일족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400년만에 20세 이상의 남자만도 60만 3550명이 될 만큼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여자와 20세 이하를 합산하면 족히 200만, 혹은 300만에 이를 만큼 엄청난 숫자입니다.
애굽은 그 나라 역사 이래로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나라입니다.
지금의 이집트는 그리 강성한 나라가 아닙니다만 성경에 나타나는 애굽은 상당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 애굽이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요셉 때입니다.
요셉에게 아무리 탁월한 지혜가 있었다고 해도 애굽 사람도 아닌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가 가능했던 데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민족이 애굽을 다스리던 시대였으니 이민족인 요셉이 등용되는 것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애굽이 다시 자기들의 국권을 회복한 것입니다.
한때 중용되었던 이민족들이 전부 찬밥 신세가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요셉 당시에는 총리의 가족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지만,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 지금은 천덕꾸러기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에 있던 야곱 일가가 애굽으로 건너간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청컨대 종들로 고센 땅에 거하게 하소서(창47:4)
야곱 일가가 애굽에 간 것은 눌러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근 때문에 잠시 머무르려 온 것이었습니다.
기근만 끝나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살다보니 가나안을 잊어버렸습니다.
총리의 일족이라는 프리미엄이 좋았는지, 애굽의 발달한 물질 문명을 누리는 것이 좋았는지, 자기네가 살고 있는 고센 땅의 기름진 목초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혹은 셋 다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기근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기근 때문에 갔는데, 막상 살다보니 애굽이 좋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노예로 전락한 것은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 번성할 때의 일입니다.
바로가 그 문제를 마음에 담았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혹시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대적의 편을 들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하다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노역에 내몰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해서 인구를 억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에게는 지혜였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고전1:18-25).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생각해낸 지혜는 고작해야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 자기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남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데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지혜가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제 노역을 시켜도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는 점점 번성했습니다.
미국이 지금은 세계 최강대국입니다만 20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이 중국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강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중국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무조건 애만 많이 낳으면 됩니다.”
지금도 강대국이 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인구가 있어야 합니다만 옛날에는 인구가 많은 것이 곧 그 나라의 국력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애굽에게는 그만큼 골치였습니다.
급기야 바로가 더 가혹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서, 히브리 여자가 아이를 낳을 적에 딸이면 살려주되 아들이면 무조건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만 남기고 유사시에 군사력이 될 수 있는 남자는 씨를 말리라는 뜻입니다.
그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었더라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십브라와 부아가 자기들이 도착하면 산모가 이미 아이를 낳은 다음이더라고 하면서 바로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는 그리 단순한 얘기가 아닙니다.
당시 바로는 태양의 아들로 알려졌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이때 바로는 이스라엘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애굽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자기 아들을 물에 던져 죽이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자기 아들을 물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 명령을 내리면 명령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직에서 내몰릴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자유 국가니까 그렇다 치고, 북한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김정일이나 혹 그 전의 김일성이라고 해도 그런 명령을 내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로는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잔인무도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통할만큼 엄청난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감히 그런 바로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성경은 이 내용을 놓고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출1:17)’라고 얘기합니다.
십브라와 부아라고 해서 바로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무서워했을 따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전통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이 문제가 그렇게 크게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이 음주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 다니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사양해도, 주변 사람들이 그 얘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도 교회 다니는데 마시더라”로부터 시작해서 별 희한한 얘기를 다 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떤 청년이 저에게 이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회식을 할 때가 있는데, 회식을 하게 되면 으레 술이 나옵니다. 저도 물론 마시기 싫지만 주변에서 권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면 저 때문에 전체 분위기가 깨집니다. 저 한 사람 때문에 전체 분위기가 깨진다면 그것도 그리 책임 있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기 때문에 화기애애한 회식 분위기가 깨지는 것은 신경 쓰면서 자기 영성에 금이 가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사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모습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보다 자기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훨씬 더 민감합니다.
행여 사람들 앞에 밉게 보일까봐 조심하느라고 하나님 눈밖에 나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서 여호와는 본래 ‘두려워해야 할 분’ ‘두려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어느 만큼 두려운 분으로 알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그 사람의 신앙이 좌우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려운 분인 것을 모르면 이 세상에 있는 오만 가지 잡동사니들이 다 두렵게 느껴집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어떤 사람입니까?
애굽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방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바로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해도 하나님보다 바로를 더 앞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