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장

출애굽기 2장





출애굽기 2장은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두 레위인 사이에서 모세가 태어날 것이고, 그 모세가 장성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해서 구원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결혼은 예사로운 결혼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 계획의 서막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사실이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자마자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아니라 나이 80이 된 다음에 이스라엘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참 느긋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지금 때가 어떤 때입니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 통하던 때입니다.
설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형편에 대해서는 인격적으로 대접받으면서 유독 사내아이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대해서만 그렇게 혹독했다는 얘기일 수는 없습니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죽이라는 명령이 통했다는 얘기는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모든 면에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곧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리고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야지, 한가하게 신방이나 차릴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혼시키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결국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명을 어기고 석 달 동안 몰래 모세를 길렀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갈대 상자를 만들어서 모세를 거기에 넣고 하숫가에 버렸습니다.
그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멀리서 모세를 살폈습니다.

마침 바로의 딸이 하수에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에 들어 있는 모세를 보았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이스라엘 여자가 자기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렇게 한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의 딸은 모세를 보고는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일의 추이를 살피던 미리암이 바로의 딸에게 유모를 소개해주겠다고 하고는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입양되는 한편, 합법적으로 자기 어머니에게서 양육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절묘합니다.
만일 바로의 딸이 그 날 목욕할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목욕을 하러 왔어도 모세가 있는 갈대 상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것으로 일이 틀어졌을 것입니다.
또 조금 늦게 왔으면 모세가 물살에 떠내려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장면에서 이런 내용이 더 잘 나타납니다.
요셉 주변에서 일어난 수두룩한 사건 중에서 단 한 가지만 어긋났어도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건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져서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선 요셉이 보디발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팔렸으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없었어도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보디발 부인이 정숙한 여자라서 요셉을 유혹하지 않았어도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굳이 첨언하면 정숙한 부인이라야 자기 집의 남종을 유혹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의 여자들은 다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노예 신분인 요셉이 감히 주인 마님을 욕보이려고 했는데 당장 극형에 처하지 않고 옥에 가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요셉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이 갇힌 옥에 투옥되지 않았어도 요셉이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이상한 꿈을 꾸지 않았어도 그렇고, 꿈을 꿨다고 해도 요셉을 무시해서 요셉에게 꿈 얘기를 하지 않았어도 그렇습니다.
옥중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죄수가 아닙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바로의 최 측근인 반면 요셉은 비천한 이방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주인 마님을 욕보이려한 파렴치범입니다.
그런 주제에 감히 지엄한 신분인 자기들의 일에 끼어들려는 발상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여지는 다분히 있습니다.
바로가 꿈을 꾸지 않았어도 요셉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꿈을 꾸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꾼 꿈마다 ‘이 꿈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냥 넘어갑니다.
그때 바로도 자기가 꾼 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면 요셉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애굽의 그 수두룩한 박사와 술객들 중에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져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정확하게 역사하시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양자가 된 모세가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는 모래에 감췄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지만 자기의 친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니 어머니에게서 들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유대인이면 자식은 당연히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부모 중에 어느 한쪽만 유대인이고 한쪽은 이방인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는 어머니가 기준입니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그 자식은 유대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 내용은 그리 매끄럽지 못합니다.
모세가 비록 혈통으로는 히브리 사람이지만 신분으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로 생각하면, 양반이 양반을 죽인 것과 양반이 노비를 죽인 것은 동일한 범죄가 아닙니다.
하물며 모세 당시는 조선시대보다 신분 격차가 더 엄격했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왕족인 모세가 사람 한 명을 죽였다고 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2-25)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은 일종의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모세가 자기 민족을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기가 일단 앞장서기만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자기에게 동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의거에 호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면 왕족이 평민을 죽인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애굽의 통치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시도라면 제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처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 목숨을 위하여 도망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독립 운동에 실패한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릅니다.
하여간 여러 해가 지났고, 바로도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모진 고통과 압제를 겪어야 했던 이유의 최고 정점에 있던 그 바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청산된 것이 아니라 바로는 죽었지만 고역은 계속 되었습니다.

한때 ‘김일성’이 민족의 원수였던 적이 있습니다.
‘때려잡자 김일성’이 군대에서 매일 외치는 구호였습니다.
그러던 김일성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북측 동포들의 얼굴에 갑자기 햇살이 비친 것도 아닙니다.
권력의 주체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바뀐 것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앞에 놓인 문제만 해결되면 자기 앞길이 평탄할 줄로 압니다.
하지만 그런 법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제 노역에 시달릴 때만 해도 ‘저 원수 같은 바로만 없으면……’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만 바로가 죽은 다음에도 자기들의 곤고한 처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참 평강과 참 안식은 주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2:24-25>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권념했다’는 얘기는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생각했다거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표현은 우리가 듣기에 어색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각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누가 보기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권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나의 이런 처지를 하나님이 아실까?”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버림받은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단지 우리가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눈은 단 한 시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