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출애굽기 3장
3장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때의 모세의 나이는 40이었는데 미디안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 모세가 나이 80이 되었고 그때까지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지냈습니다.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가 호렙산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불만 타오르고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불이 타려면 뭔가 연소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연소되는 것도 없이 불만 타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연 법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의아하게 여겨 떨기나무를 자세히 살필 요량으로 가까이 다가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제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신을 벗는 것은 종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종은 신발을 신지 못했습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으면 가장 먼저 신발을 벗겼습니다.
결국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라는 얘기는, 하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을 바쳐야 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불만 붙고 나무는 타지 않는 것이 아무리 신기해도 그것을 살피려고 가까이 가는 것보다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제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교회 다니는 사람은 왜 술을 마시면 안 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기 이전에 따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체 그것을 궁금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서 앞으로 절대 마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는 마셔도 될 것 같은데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찔리지 않고 마실 수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마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한사코 그 이유를 따지는 것은 다분히 불건전한 호기심입니다.
어떤 집에서 아이에게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예” 하고,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요? 왜 하지 말아야 해요?” 하고 캐묻는 아이는 매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왜요?” 하고 묻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집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왜 유독 자기네 집에서는 컴퓨터 게임을 못하게 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것을 궁금하게 여길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그 아이의 인생에 백 배는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궁금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으면 먹지 않으면 됩니다.
“왜 먹으면 안 될까?” “대체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 하고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의 비전을 말씀하셨습니다.
3:7-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몇몇 교인들에게 출애굽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장면이 연상되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결같이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연상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 대답이 가장 일반적인 대답일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좌우에 물로 벽이 만들어지고, 이스라엘이 그 사이를 걸어서 애굽을 탈출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신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출애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반드시 홍해를 가르고 너희로 하여금 애굽을 벗어나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없고 “내가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라는 말씀만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애굽을 탈출하는 것이 곧 출애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출애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홍해를 건너지 않고는 가나안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홍해는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건너는 것이지, 홍해를 건너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 어느 곳을 읽어도 “내가 너희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할 테니 홍해를 건넌 다음에 가나안에 가든지, 말든지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요컨대 출애굽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곳에 흐르는 젖과 꿀을 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가지 않고 단지 홍해만 건너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가 위치한 곳이 홍해 이쪽편이냐, 저쪽편이냐 하는 문제는 물론 중요합니다.
애굽의 노예냐, 아니면 자유의 몸이냐 하는 문제가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인지, 의의 자녀인지를 따지는 기준이 홍해를 건넜느냐, 말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홍해를 건너기 이전으로 족합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홍해를 건너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홍해를 건넌 다음에는 ‘나는 홍해를 건넌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닐 겨를이 없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속히 가나안에 가야 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가 홍해를 건넌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증 받는 것이 아니라 빨리 가나안에 가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요즘말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얘기할 적에 예수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 따지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장차 그 사람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 천국 기업인지 지옥 형벌인지가 거기에서 좌우되기 때문에 그 문제보다 더 중요한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끼리 모인 자리에서 예수를 믿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때는 어느 만큼 믿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신앙의 유무’가 아니라 ‘신앙의 수준’을 얘기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가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신 이유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출애굽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것처럼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신앙은 자기가 홍해를 건널 때 얼마나 감격했고, 홍해를 건넌 기억이 얼마나 생생한 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로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모세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이끌어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으면,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전혀 엉뚱한 얘기를 했습니다.
3:11-12>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스라엘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속된 표현을 빌리면 거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하물며 모세는 임금의 명을 거역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감히 말대꾸를 했습니다.
군대에서 사단장이 하는 얘기에 대해서 작대기 두 개 달고 있는 일등병이 말대꾸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사건입니다.
비단 모세의 말대꾸만 의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세의 얘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결국 이 얘기는 하나님께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든지, 아니면 뭔가 숨겨진 내용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모세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라.
모 세> 싫습니다. 제가 누군데 그런 일을 해야 합니까?
이런 대화가 오고갔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웠노라. 그러니 너는 속히 이스라엘을 구원하거라.”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없으려면 애초에 모세가 질문한 내용은 “하나님,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면 제가 그 일을 할 동안에 하나님께서 저를 지원해주실 것입니까?”라는 내용이었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제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실 것입니까?”라고 묻고,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대답하셔야 앞뒤가 매끄럽게 연결됩니다.
이렇게 따지면 모세가 겉으로는 “하나님, 싫습니다. 제가 누군데 그런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지금 말씀하시는 그 일은 제가 이미 40년 전에 시도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저에게 아무런 신경도 써주지 않으셨고, 그 바람에 저는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는 불만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구국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적이 있습니다.
쓰러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굽의 왕족이라는 고귀한 신분도 마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기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가 40년이나 지난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시니 모세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얘기는 ‘그때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이 생략된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를 도와줄 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 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이 이야기를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체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을 텐데,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대체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를 알아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께는 이름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전부 이름이 있습니다.
제우스, 포세이돈, 박쿠스 등이 신의 이름입니다.
신이 하나뿐이면 그냥 ‘신’이라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집에 성경책이 한 권뿐이면 그냥 ‘성경책’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 집에서는 ‘성경책 좀 갖고 와요’라고 하면 그것으로 말이 통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30여 권이 성경책이 있습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성경책 좀 갖고 와요’라고 하면, 제 아내는 대체 어떤 성경책을 갖고 오라는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면 천상 어떤 성경책을 갖고 오라는 얘기인지, 성경책의 이름(종류)을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따지면 하나님께 이름을 묻는 것은 정상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수두룩한 신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 수두룩한 신 중의 한 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름을 단지 이름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신분이나 속성, 성품이 같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름을 묻는다는 얘기는 “당신을 부를 때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은 정체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부분이 ‘I am that I a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굳이 없는 말을 만들면 ‘나는 I am이다’라는 얘기가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된 부분이 원문에는 ‘에혜 아쇌 에혜(היהא רשׁא היה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한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의 말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나라 사극에 흔히 나오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표현을 영어로 옮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영어로 하면 ‘Thank you’라고 합니다.
또 ‘황공무지로소이다’를 영어로 하면 ‘I\'m sorry’입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와 ‘Thank you’가 같은 뜻 같습니까?
또 ‘I\'m sorry’와 ‘황공무지로소이다’가 같은 뜻 같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도무지 같은 뜻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밖에는 번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에혜 아쇌 에혜’도 도무지 우리말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히브리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우리말로는 억지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했고, 영어로는 ‘I am that I am’이라고 했는데 어쨌든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긴다면 ‘나는 늘 있다’ ‘나는 있는 것을 있게 한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때 있다’ ‘나는 내가 일해야 할 때 일한다’ 등의 뜻이 됩니다.
도무지 우리말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은 아무개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성품이나 속성, 사역 내용으로 대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부 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라는 이름이 마치 구원을 가져다주는 부적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말만 들으면 당연히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니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예수님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의 예수가 대략 200명 가량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도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둘이 있었고 또 예수님의 동생 중에도 유다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 말고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에 그 어떤 신통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그 분의 총체적인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예소’였으면 구원을 얻지 못했을 텐데 ‘예수’여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은 아무 때나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작정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따라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속 알맹이가 주님 보시기에 바른 모습인지 그 이름을 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속성과 연결해서 있는 것이지, 이름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학 졸업반인 청년이 자기의 진로를 놓고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졸업 후에 진학을 해야 할지, 편입을 해야 할지, 취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기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해야 자기 앞길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겠는지를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세상에서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거룩을 찾지 않고 형통을 찾는 것은 죄다 종교적인 언어유희에 불과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얘기를 자기 욕심과 결부시켜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기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욕심을 이루는 방법으로서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자기가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자기 욕심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술로만 하나님의 성호를 부르면 저절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부르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지만 우리 하나님은 늘 있는 분입니다.
있는 것을 있게 하는 분이고, 있어야 할 때 있는 분입니다.
일해야 할 때 일하시는 분입니다.
홀로 완전하신 분이고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나서서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아무개다’ 하고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과 일하시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일이 이루어질까?’를 궁금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설 수 있을까?’를 궁금하게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