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출애굽기 5장





모세와 아론과 함께 바로를 만나는 것으로 5장이 시작됩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여태까지 자기들의 왕이었던 바로에게 자기들의 진정한 신분을 밝히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분에게서 이상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자기는 특정한 종교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교회에 가고 절간 다니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절간에 가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오직 기독교 하나만 아는 저를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렸느냐, 말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 전반에 대한 문제입니다.
만일 예배에 참가했느냐, 말았느냐의 문제라면 주일에는 교회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평일에는 불공을 드려도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이때 모세가 단지 예배 의식에 대한 얘기만 했으면 바로도 그리 심하게 노여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깐 짬을 내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배를 마치는 대로 다시 애굽의 종으로 충실하게 지내겠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허락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절)\'라는 것이 모세의 얘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내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광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애굽의 통치권을 벗어나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종으로 알고 있는 바로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신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배를 빼먹었느냐, 말았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삶의 주인을 누구로 모시느냐에 대한 얘기입니다.

모세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바로는 이스라엘을 보내주는 것은 고사하고 강제노역을 더욱 혹독하게 시켰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아예 주지 않을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벽돌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벽돌을 만드는데 필요한 짚은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만들게 했습니다.
짚을 조달하는 일도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만들어야 하는 벽돌 수량은 조금도 감해주지 않았습니다.

흙을 이기고 다져서 벽돌을 만들고 운반하는 일에 더하여 짚까지 조달하면서 벽돌을 예전만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만들어야 하는 벽돌 수량을 다 채우지 못했고, 그 일 때문에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일을 바로에게 탄원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짚을 공급해주다가 갑자기 짚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자기들로서는 벽돌 수량을 채울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일을 문제 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억울함을 바로에게 하소연한다는 얘기는 바로에게 말을 하면 바로가 자기네 사정을 들어줄 줄로 알았다는 뜻입니다.
\"바로시여, 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지금까지 저희들은 벽돌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벽돌에 필요한 짚까지 저희들에게 준비하라고 하면 저희들로서는 벽돌 수량을 맞출 수가 없는 일 아닙니까? 이치가 이러한데 현장 감독은 이 일을 놓고 저희에게만 책임을 물으니 저희로서는 억울할 따름입니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셔서 시정해주십시오.\"라고 하면, 말이 통할 줄로 알았습니다.

요컨대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앞으로 바로와 관계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던 대로 바로에게도 고분고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절기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광야로 간다는 모세의 얘기에 대해서 바로는 노발대발했지만 실상 이스라엘은 바로의 통치를 벗어날 마음이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결혼을 했다는 얘기는 한 남자의 아내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자가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기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 남자가 자기를 만나면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줬는데 결혼한 다음부터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따졌습니다.
\"이봐요!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 있어요? 내가 결혼 좀 했다는 사소한(?) 이유 하나로 사람을 그렇게 다르게 대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다르게 대하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다르게 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이런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자기들은 철저하게 바로의 눈밖에 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 세상에 속해 있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 세상이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들 손아귀에 잡아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관인 것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가 하나님께로 신분이 바뀌는 사람들조차도 자기들의 신분이 바뀌는 것에 그리 매력을 느끼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담배를 끊는 것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체내에 있는 니코틴이 계속 새로운 니코틴을 찾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피우지 않으면 금단현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금연에 대한 의지가 상당히 강하기 전에는 도무지 금단현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물며 \'끊을 수 있으면 끊고 없으면 만다\'는 생각으로는 도무지 담배를 끊을 수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우리를 옭아매려는 힘보다 더 강한 힘으로 하나님 쪽으로 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면 걸음을 옮기다가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이내 포기합니다.


5:19-21>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애굽의 노예였던 자기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었는데, 신분이 바뀌고 보니 애굽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왜 공연한 일을 해서 자기들을 피곤하게 하는지, 그 사실이 원망스럽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에게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들이 기준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일을 하면 하나님의 일로 인정되지만 자기들에게 불리한 일은 절대 하나님의 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서라도 그런 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단지 자기들에게 유리한 일이 있게 해주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얘기가 어느 만큼 황당한 얘기인지는, 앞에 있는 내용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29-31)


모세와 아론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구원 계획을 들을 때만 해도 이스라엘은 전부 환호했습니다.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첫 걸음이 자기들의 고난으로 나타나자, 당장 말을 바꿨습니다.
왜 바로의 손을 빌려서 애꿎은 자기들을 죽이려 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들의 형통\'을 동의어로 생각하면 별 수 없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미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애굽의 노예로 지낸 사람들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이 썩 자랑스러운 신분은 아니지만 이미 몸에 익었기 때문에 견딜 만합니다.
애굽의 말만 잘 들으면 가끔 고기도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라는 신이 있어서 자기들을 더 잘 살게 해주면 나쁠 거야 없지만,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찾을 마음은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청년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전부터 교회에 관심이 있었답니다.
자기도 남들처럼 교회에 가고 싶어서 몇 번 가기도 했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교회에만 가면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서, 자기는 아무래도 교회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야, 혹시 네가 교회 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사코 방해하는 그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그 사실이야말로 네가 기를 쓰고 교회에 붙어있어야 되는 이유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어쩌면 교회는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인 곳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쪽으로 다가서는 것을 기를 쓰고 방해하려는 세력이 정말로 있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기필코 교회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5:22-23>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홍해를 가르는 모습이나 십계명 돌판을 받아들고 시내산을 내려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연상할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모세는 홍해를 가르기도 했고, 십계명 돌판을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아직 그런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원망을 듣더니 그 내용 그대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나 모세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본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부터 마지못하여 일을 떠맡았습니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모세였으니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만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언제 나서서 일을 한다고 했습니까? 억지로 일을 맡겼으면 제대로 밀어주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 흔드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했는데, 백성들은 원망하고 하나님도 모른 척하고, 저한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 이것이 모세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홍해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홀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아오는, 우리가 아는 모세로 바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