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6장


출애굽기 6장





4장에서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을 때만 해도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5장의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아간 다음부터 고역이 더 심해졌고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4장에서 5장으로 넘어오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엉망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태를 반전시킬 만한 획기적인 계기나 처방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과 같이 월드컵 개최국으로 결정되었는데 당시 우리 나라 축구의 국제 성적은 엉망이었습니다.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유치하는데는 성공했는데 정작 우리는 장소만 제공한 채 들러리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비싼 돈을 주고 외국에서 감독을 들여온 것입니다.
그가 바로 히딩크입니다.

이스라엘의 분위기가 바로 그렇더라는 말씀입니다.
사태가 이런 상태로 지속된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도무지 성취될 것 같지 않습니다.
구원의 여망을 불태우는 것은 고사하고 강제 노역만 심해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태의 심각성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느긋하게(?) 말씀으로만 하십니다.
하늘 문을 열었다 닫는 이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로를 꼼짝 못하게 하지도 않았고, 천둥, 번개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각심을 촉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말씀이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앞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테크닉에 민감합니다만, \'어떻게?\'를 따지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나 조직이나 제도보다 사람이 우선합니다.
조직을 개편하거나 제도를 정비하는 것에서 될 일이 안 되거나 안 될 일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걸핏하면 내각을 개편합니다만 내각을 개편했다고 해서 국정 운영이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가 문제입니다.

조직이나 제도보다 사람이 선행한다는 사실에는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이 다 얽히고 설킨 것 같은 지경이 되었는데도 이적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지 말씀만 하시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 \'강한 손\'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쓰셨습니다.
대체 누구의 손이 강한 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으로는 바로의 손이 강한 손입니다.
바로가 그 강한 손으로 자기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숨도 마음놓고 쉴 수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손이 강한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강한 손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나의 강한 손으로 바로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강한 손으로 바로를 굴복시키마\'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굴복시키는 것을 모세가 봐야 합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를 굴복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교육시키는데 있습니다.


6:2-3>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내가 지금까지 너희 열조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난 적은 있지만 여호와로는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나타낸 적이 없지만 앞으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나타내겠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뜻 납득이 안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라는 이름이 숱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노아보다도 훨씬 더 고참(?)인 에노스(아담의 손자) 때에 사람들은 이미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린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성경에는 엘, 엘로힘, 엘 샤다이, 아도나이, 여호와 등 하나님의 이름이 상당히 다양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아무개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모범적인 기업가이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고 인자한 아버지다. 또 책을 쓰면 훌륭한 저술가이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이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한 가지 표현으로 그 사람을 다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한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하게 나오고, 그 모든 이름마다 고유의 뜻이 있습니다.

전능의 하나님은 \'엘 샤다이\'를 번역한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강조되었습니다.
단적인 예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이 별을 보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저 하늘의 뭇별을 봐라. 내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너한테 아들 하나 있게 못할 것 같으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만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는 것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느 만큼 크고 놀라운지를 알아야 하나님을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갖는 속성으로 자신을 나타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4-7>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이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찌라


\'너희들이 종노릇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나는 여호와다. 내가 너희를 애굽의 압제에서부터 건져내겠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알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의 신세에서 벗어난다는 사실과 관계하여 \'여호와\'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호와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 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이런 사역을 계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남의 종으로 전락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애굽에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종으로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속성을 보여주는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때만 해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갖는 속성은 보이지 않은 채 \'내가 장차 가나안 땅을 너희 후손에게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이상,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있는 상태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만큼 비참한 형편인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따지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스라엘은 그런 언약에 대해서 무지하더라는 사실입니다.


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했을 때만 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마 그때의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그토록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모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는 인사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모세가 바로를 만난 다음부터 노역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급기야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다.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을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전했지만 그들은 모세의 얘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처지가 곤궁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세가 바로를 만난 다음부터 바로가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면 모세의 얘기를 반겨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얘기가 이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을 기준으로 취사선택하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중이고,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떠난 때문이라는 얘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고통이 있다는 이유로 모세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6:10-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보내게 하라


제가 종종 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저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면, 저는 말로만 축하하는 거냐고 되묻습니다.
\"말로만 하는 축하는 전부 빈말이라던데 말로만 하지 말고 뭔가 주면서 축하하라\"고 합니다.
제 얘기는 물론 농담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스라엘은 실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자기들을 구원하실 요량이라면 자기들 눈앞에 보이는 실제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채 구원만 말씀하시니 그런 얘기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사태가 어느 만큼 악화되었고 일이 어느 만큼 꼬였는지는 전혀 모르고 마냥 속 편한(?) 말씀만 하십니다.
모세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으면 \"그런 일이 있었느냐? 알았다, 그 정도는 나도 다 예상하고 있었다. 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 너무 염려 말아라.\"라는 말씀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들어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보내게 하라\"가 전부입니다.
마치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만 하면 바로가 거기에 순종해서 이스라엘을 얼른 내보낼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대책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서 모세의 얘기가 훨씬 합리적입니다.
\"하나님, 생각 좀 해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도 제 얘기를 안 듣는 형편인데 바로에게 얘기를 하면 바로가 제 얘기에 신경이나 쓰겠습니까?\"라는 모세의 얘기는 지극히 타당한 얘기입니다.
아마 모세는 하나님을 전후 사정도 모르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답답한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모세가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라고 얘기한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바로를 설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상황은 어렵게 꼬였지만 자기에게 비상한 재주만 있으면 바로를 설득시켜볼 여지라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을 맡겼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6: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그런데 성경의 기록은 점입가경입니다.
모세의 논리적인 항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셨고 바로에게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고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모세가 바로에게 하나님의 명을 전했고 결국 이스라엘을 인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문맥으로만 따지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일기를 쓰는 식으로 그 날 있었던 일을 그 날 그 날 써서 모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회고하면서 쓴 기록입니다.

요컨대 성경의 관심은 \'일이 이루어진 절차를 설명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게 마련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노우 하우\'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모세가 갖고 있는 의문이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14-25절에는 모세와 아론의 계보가 나옵니다.
성경을 읽을 적에 가장 재미없는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듣기에도 생소한 이름만 잔뜩 나열되는데 워낙 생소한 이름이니 발음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건너뛰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성경은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재미없는 책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그런 선입견을 더욱 부추기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언급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6:26-27>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어 보내라 말한 자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성경이 그 귀중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언급한 것은 본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이도 모세와 아론이었고.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도 모세와 아론이었다. 이 모세와 아론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이라는 의미로 미리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언급한 것입니다.

요즘도 동명이인이 많습니다.
하물며 언어가 분화되지 않은 고대사회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아론만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세나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의 이름이 모세와 아론이라고 하더라\'로는 부족합니다.
그 모세가 어떤 사람이고 그 아론이 어떤 사람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한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에까지 선이 닿는 모세와 아론이었더라\'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언약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모세와 그 아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6:29-3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고하라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차곡차곡 시행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과 엇박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12절에서도 자기는 입이 둔하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 얘기를 한 번 더 반복합니다.
모세 생각에 자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자기의 변변치 못한 말주변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로에게 전하는 것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가 바로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결재를 받으려면 바로를 설득시켜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무가내로 말씀하시니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1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를 굴복시키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는 내가 책임질 테니 너는 나를 믿고 일해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바로에게 하는 것을 잘 보고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바로에게 있지않고 모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아홉 번째 재앙까지도 이스라엘을 내보낼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바로가 모든 장자가 다 죽는 열 번째 재앙을 통하여 결국 항복하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동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권투 경기의 경우 세계 타이틀 매치는 12회전까지 합니다.
중간에 KO로 승부가 갈리기도 합니다만 KO로 승부가 나지 않으면 12회까지 경기를 계속합니다.
12회까지 경기를 한다는 얘기는 어느 한 쪽도 상대방을 KO시킬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제가 헤비급 세계 챔피언과 경기를 하면 몇 초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는 10초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아마 잽 한 방 맞으면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굴복시키는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이때 열 번째 재앙만에 굴복한 바로는 나중에 홍해에 빠져죽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바로를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재앙을 열 번씩이나 거듭해서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죽여버리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때의 열 가지 재앙은 바로를 항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느 만큼 강한 분인지를 생생하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가 하나님께 쩔쩔매는 것을 보게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모세는 하나님께서 공연한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교육시키는 중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사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옛날 모세를 교육시키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우리를 교육시키십니다.
우리의 전 인생에 간섭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꿔놓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