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9장
출애굽기 9장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5:1, 7:16, 8:1, 8:20, 9:13, 10:3 등에서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뜻은 언제든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에게는 \'너도 내 백성과 더불어 나를 섬겨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은 스무 살 넘는 남자만 60만 3,550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바로에게도 기회를 줄 만한데, 바로에게는 전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죄에게는 경배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바로에게는 경배를 받을 마음이 없으시구나.\"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부족한 모습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늘 확인해서, 혹시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 된 속성을 벗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길 것인지, 그게 아니면 죄와 한통속이 되어서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다섯 번째로 내린 재앙은 가축들이 돌림병으로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바로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분분합니다만 아멘호텝 2세일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합니다.
바로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입니다.
특정 시기에 애굽을 다스렸던 애굽 왕의 이름이 아니라 애굽 왕을 뜻하는 말이 곧 바로입니다.
학교 다닐 적에는 파라오라고 배웠습니다.
하여간 애굽 역사상 숱한 바로가 있었는데,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집트에 남아있는 벽화 중에 아멘호텝 2세가 소 밑에 들어가서 소젖을 빠는 모습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소 밑에 들어가서 소젖을 빨았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아마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사람이 소젖을 빠는 모습을 벽화로 남길 정도였습니다.
당시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 중에 소의 형상을 한 우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피스라는 이름의 우상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적에 산밑에 있는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는데, 그 금송아지가 바로 아피스입니다.
결국 가축에 돌림병을 내린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이 섬기는 또 하나의 신을 벌하신 것입니다.
9: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생축에 벌을 내리시는데 애굽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무작정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소유인지 이스라엘의 소유인지를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만 구별하지 않으시고 신자에 속한 것과 불신자에 속한 것도 같이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보호하시지 않고 우리의 소유도 같이 보호하십니다.
만일 우리 소유가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소유를 당연히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 세상 풍조에 맡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9:6-7>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생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존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바로가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었습니다.
바로가 그것을 보고는 사람을 고센 땅에 보내어 이스라엘의 생축은 어떠한지 확인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애굽의 모든 생축이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의 생축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미리 얘기한 대로 된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단지 알기만 했습니다.
우연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를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바로의 이런 모습이 상당히 미련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해보십시오.
십중팔구 싫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지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설령 지옥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돌이킬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재앙은 애굽 모든 사람들에게 독종이 발하는 재앙입니다.
9:8-9>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풀무의 재를 하늘로 날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 내용을 보는 우리는 여기에서 말하는 풀무가 어떤 풀무인지 몰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직접 들은 모세와 아론은 어떤 풀무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 풀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알 만한 풀무였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신4: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일을 쇠풀무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쇠풀무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강제했던 그 어떤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는 유대인들이 굴뚝에서 솟아 나오는 검은 연기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은 누군가 가스실에서 처형당하여 그 몸이 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굴뚝 연기만 보면 공포에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풀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몸서리를 치던 풀무였을 것입니다.
그 풀무에 가서 재 두 움큼을 취하여 하늘에 날리라고 했습니다.
그 풀무의 재는 애굽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받은 고통과 눈물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을 하늘로 날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애굽을 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것을 하나님은 그냥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고 있는 고통이 풀무의 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학대한 모든 학대가 애굽에게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물과 땅을 저주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늘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저주했더니 풀무의 재가 독종으로 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우박이 내리고, 난데없는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더니 급기야 애굽 천지가 암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재앙입니다.
9:11>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
독종으로 인한 고통에는 술객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애굽 사람이니까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면서 \'약한 것이 곧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 술객들은 자기들이 약하게 되니까 아예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인지, 죄의 종인지가 극명하게 구분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위축되는 법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때 베드로에게 감기 기운이 있었으면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못했겠습니까?
사단의 하수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은 고스란히 사역의 위축으로 이어집니다.
일곱 번째는 우박 재앙입니다.
그런데 우박만 내린 것이 아니라 불도 같이 내렸습니다(23절).
우박이 내리는 것은 자연 현상일 수 있습니다만 불이 내리는 것은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특히 우박은 얼음 조각인데 우박과 불이 어떻게 같이 내립니까?
우박만이 아닙니다.
33절에 의하면 이때 비도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과 불이 어떻게 동시에 내립니까?
이때의 우박은 자연 재해가 아닌 신적 기원을 갖는 재앙이었음이 자명합니다.
9: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찌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우박을 견디지 못한 바로가 다시 항복을 청했을 때 모세가 한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을 내보낼 테니 우박을 그치게 해달라는 바로의 얘기에 모세가 \'알았오, 그럼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박을 그치게 하겠오.\'라고 하지 않고 \'알았오. 내가 밖에 나간 다음에 손을 하늘로 펴면 우박이 그칠 거요.\'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개구리 재앙이 내렸을 적에, 개구리가 없어지는 시점을 바로에게 정하게 했습니다.
그때 바로는 자기가 말한 날에 개구리가 더 죽어 자빠지는 것을 보면서 그 개구리 재앙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사역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한 번 더 극적인 효과를 연출합니다.
우박이 그쳐도 아무렇게나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손을 들면 그치게 함으로써 바로에게 계속 하나님을 설명했습니다.
\'정신차리고 잘 봐라. 이 우박은 나의 작품이다. 이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바로에게 알리셨습니다.
물론 바로도 그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줄은 압니다.
그런데 단지 알기만 합니다.
9: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아무리 하나님을 계시하셔도 바로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줄을 아셨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에게 알리셨습니다.
9:31-32>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나맥은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는 얘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삼과 보리, 밀과 나맥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필요 없는 내용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느 만큼 패역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조차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보리와 삼만 상하게 했을 뿐, 아직 자라지 않은 밀과 나맥은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애굽 사람들을 전부 굶어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징계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우박과 비를 내리면서 거기에 더하여 서리까지 내렸으면 밀과 나맥도 얼어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박 재앙이 내린 당시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지나간 다음에도 두고두고 기근에 시달렸을 텐데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9:34-35>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이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자주 나오는 것처럼 \'바로가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도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립을 지켰으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로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주시고는 그것을 빌미로 바로를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가 완강하게 하나님께 항거하다가 마지막에 힘이 밀려서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완악한 바로조차도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단이라고 해서 하나님과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용인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권능과 영광이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압제하고 위협해도 하나님이 마치 방파제처럼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이 제멋대로 날뛰는데, 제멋대로 날뛰는 세상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움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