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0장


출애굽기 10장




10장에는 메뚜기 재앙과 흑암 재앙, 두 가지의 재앙이 소개됩니다.
펄벅의 대지에 보면 메뚜기 떼가 날아와서 모든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나라에는 그런 일이 없지만 메뚜기 떼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것처럼 엄청난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면 곡식이라는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초록색을 띤 것은 죄다 황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내린 메뚜기 재앙은 그 정도의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그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네 아비와 네 조상이 세상에 있어옴으로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6절)\'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인 홍수와 노아의 홍수가 그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때의 메뚜기 재앙도 그렇습니다.
애굽에 지금까지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경험한 메뚜기 떼와 차원이 다른 메뚜기 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애굽에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언제, 어느 정도로 있었는지 일일이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출9:18)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애굽이 건국된 지 약 1500년쯤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1500년 동안의 일기를 전부 다 알고 계십니다.

전문 바둑 기사들은 대국이 끝나면 그 판을 복기합니다.
맨 처음에 바둑돌을 어디에 두았더니 상대방이 어디에 두었고, 그 다음에는 어디에 두었고, 그 다음에는 어디에 두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합니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10수나 20수만에 판이 끝난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200수가 넘어가는 판을 어떻게 복기합니까?

복기가 가능한 이유는 의미 없는 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에 따라 돌을 놓는 곳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어디에 돌을 놓을지 자기도 모르면서 바둑을 두면, 판이 끝난 다음에 복기를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바둑돌마다 의미가 있는 수를 두었으면 당연히 복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둑판 정도가 아닙니다.
애굽 역사 1500년의 일기도 복기하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날씨를 가리켜서 \'안 좋다\'고 표현하는 것은 재고해봐야 합니다.
일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놓고 자기 감정에 따라서 좋은지 나쁜지를 평하는 것은 불경일 수도 있습니다.
날씨에는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맑으면 맑아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은 날만 있습니다.


이런 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바로가 한 번 더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대체 하나님을 섬기러 갈 자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8절).
이스라엘 전부가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대다수는 그냥 애굽에 남고 대표를 뽑아서 그들만 하나님을 섬기면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바로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자기들 전부는 물론이고 우양까지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바로가 탐탁하게 여길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을 계속 막으려니 자기가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허락하되, 하나님을 섬기는 한 번의 행위가 이후로도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징표임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의 행위로 끝나기를 바랍니다.

맨 처음에 바로는 \'제사는 드리되 이 땅에서 제사드리라(8:25)\'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8:28)\'고 했고, 그 다음에는 \'가기는 가되 아이들은 놓고 가라(10:11)\'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을 최소화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이 세상의 미혹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가는 자기 아이에게 \'예배 끝나면 빨리 와서 공부하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배 참석 자체를 만류할 수는 없지만 예배가 끝난 다음에도 교회에서 지체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도 역시 그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었던 얘기 중에 가장 황당한 얘기로 꼽을 만한 얘기가 있습니다.
자기 아이가 수련회만 다녀오면 나쁜 버릇이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쁜 버릇이 있다가도 수련회에 다녀오면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오히려 나쁜 버릇이 들어서 온다니 교육 부서를 맡고 있는 저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얘기였습니다.

그 아이는 마침 제가 지도하는 아이였습니다.
교회 출석은 하는데 신앙이 바로 잡힌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교회 안 나오는 날보다 나오는 날이 조금 많은 정도였고, 교회 나오는 날도 제시간에 나오는 법 없이 항상 늦게 나오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얘가 대체 무슨 사고를 치나……\" 싶은 마음으로 그 다음 얘기를 들었는데 그 다음 얘기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수련회 전에는 그런 일이 없다가 수련회만 다녀오면 주일 아침에 예배 늦었는데 안 깨웠다고 짜증을 낸다는 것입니다.
밤에 늦게 자기 때문에 일요일이라도 잠 좀 자라고 일부러 깨우지 않는데, 수련회만 갔다 오면 꼭 티를 낸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가끔 교회를 빼먹고 공부도 하는데 수련회만 갔다 오면 기를 쓰고 교회 간다면서, 그것을 \'나쁜 버릇\'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이 세상만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예수는 대충 믿어도 세상은 야물게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덟 번째 재앙이 지나가고 아홉 번째 재앙이 오는데,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 재앙입니다.
애굽 사방천지가 갑자기 흑암으로 변했습니다.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 내린 재앙은 모두 열 가지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는 열 번째 재앙이 가장 강도가 강한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아홉 가지 재앙은 강도가 약한 것에서부터 강한 것 차례로 배열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홉 번째 재앙이 재앙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약한 것 같습니다.

사방이 어두워지는 것이 무슨 재앙입니까?
아마 사람들을 모아놓고 열 가지 재앙 중에 한 가지씩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전부 다 흑암 재앙을 택할 것입니다.

집에서 수도를 틀었더니 물 대신 피가 나오고 정수기에서도 피가 나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또 냉장고를 열었더니 개구리가 튀어나오고 씽크대 위에서도 개구리가 뛰어다니는 것도 질겁할 일입니다.
집안 가득 이가 들끓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입니다.
이런 일보다는 불을 켜지 않고 어둡게 지내는 것이 한결 나을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애굽 사방천지가 어둡게 변했다는 얘기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애굽은 숭배하는 우상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중에 최고의 신이 태양신 \'라\'입니다.
바로를 태양의 아들로 숭배했습니다.
그러니 애굽 사방천지가 어둡게 변했다는 얘기는 애굽에서 섬기는 최고 우두머리 신이 결박당했다는 뜻입니다.


10: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흔히 말하는 어두움은 빛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두움\'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으면 그것이 곧 어두움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본래 어두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애굽 땅 위에 빛이 없게 하라\'고 되어 있지 않고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고 해서, 흑암 자체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 흑암을 가리켜서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고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불켜진 방에서 불을 켜기 위해서 벽을 더듬는 것과 유사한 경우인 듯 싶지만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영어성경에는 darkness that can be felt라고 되어 있습니다.
느낄 수 있는 흑암을 말합니다.
또 어떤 성경에는 felt대신 touched가 쓰이기도 했습니다.
만질 수 있는 흑암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때 애굽에 내린 흑암은 \'빛이 없어서 어두운 상태\'가 아니라 실체가 있는 흑암이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면 느껴지기도 했고 만지면 만져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흑암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흑암을 애굽에 내리셨습니다.


10:22-23>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어두우면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어두우면 불을 켜면 될 것 아닙니까?
당시 애굽 사람들도 어차피 밤에는 등잔불을 키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흑암 재앙이 내렸을 적에는 아예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컨대 이때의 어두움은 불을 켜도 사라지지 않는 어두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흑암 재앙을 내렸다는 얘기는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다거나 평소보다 어두운 정도가 더 심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두움에 실체가 있어서 만지면 만져지는 어두움이었고, 불을 켜도 사라지지 않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이때 이들이 처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두려움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욜2:1-2)


여호와의 날을 가리켜서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뵙는 날을 천군천사의 나팔과 함께 우리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모되는 휘황찬란한 날로 연상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불신자들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 하는 날입니다.
그곳에서는 한 줄기의 소망의 빛도 느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어둡고 캄캄한 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쓰인 \'여호와의 날\'이라는 단어와 \'모세가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애굽 온 땅에 있었다\'고 할 때의 \'캄캄하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당시 애굽에 내린 흑암은 정전 사고로 불이 나간 어두움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에나 있을 만한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 어두움이 삼일 동안 애굽을 덮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일초, 일초를 지나는 것이 곧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채 꼬박 삼일 동안 지옥의 공포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어두움이 임한 곳은 애굽 사람들의 거주지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흑암 대신 광명이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사망이 있는 대신 신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불신자들에게는 절망이 있는 대신 신자들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광명이 있는 곳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광명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때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집과 애굽 사람이 사는 집이 맞닿아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 경계를 따라 흑암과 광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 주변은 밝게 마련입니다만 이때는 흑암과 광명이 두부를 자른 것처럼 구분되었습니다.


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


바로의 최후 흥정입니다.
\"알았다. 너희 말대로 하겠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은 다 보내주겠다. 단 너희 가축만 놓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제안은 상당히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내용의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의 얘기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로 단정합니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지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는 마당에 소나 양이 뭐 그리 대수로운 문제입니까?
우리 나라에도 북쪽에서 생활하다가 자유를 찾아서 문전옥답 다 버리고 월남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생각하면 재산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재산에 연연하여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요즘말로 옮기면 \'예수는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돈이 무슨 상관이냐?\'라는 얘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되지, 왜 신앙을 돈으로 따지느냐?\'고 하면, 타당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우더라도 신앙과 소유를 분리하여 얘기하는 것은 궤변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물질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회는 조직의 특성상 돈 얘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은혜 안 되게 교회에서 돈을 따지느냐?\'는 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령한 곳이기 때문에 돈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곳이기 때문에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바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돈 얘기를 꺼내면 \'치사하게 돈으로 신앙을 따진다\'고 하는데, 그래도 별 수 없습니다.
왜 치사하게 돈으로 신앙을 따져야 하느냐 하면, 사람은 돈이 걸렸을 때가 가장 치사해지기 때문입니다.
돈 말고는 치사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지켜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유도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우리의 재산을 당연히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재산을 이 세상의 풍조에 방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바로가 소유는 두고 몸만 가라는 얘기는,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돈 몇 푼을 따져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한 일에 쓰여야지, 죄를 위하여 쓰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죄와의 단절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