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4장

출애굽기 14장





출애굽기를 읽을 때 가장 신나는 내용이 14장에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이 그 사이를 걸어서 애굽을 나온다는 내용이 14장에 나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낸 직후의 일입니다.
재앙을 견디다 못한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기는 했는데, 보낸 다음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 많은 노예를 그냥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한 일입니다.
그래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뒤를 따랐다가 홍해에서 전부 몰살하게 됩니다.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바로는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판단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뛰어봐야 벼룩입니다.
손오공이 제 아무리 재주를 부려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는데 하물며 바로가 하나님의 장중(掌中)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바로를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게 한 다음에 그것을 트집 잡아서 애굽 군대를 모두 몰살시킬 계획을 세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바로는 스스로 완악한 가운데 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완악함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데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오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급기야 모세를 상대로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성경을 읽다가 이런 대목을 보면 짜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셨는데 불평을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잠시만 기다리면 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텐데 왜 이리 믿음이 없는지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 내용만 놓고 따지면 말이 맞습니다.
가나안에 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사는 것과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것을 비교하면 가나안에 가서 사는 것이 낫습니다만 광야에서 죽는 것과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을 비교하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는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꼽으라면 괜히(?) 예수를 믿는 바람에 세상에서는 양심이 찔려서 자기 마음대로 못 살고 신앙 수준이 별볼일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예수 믿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세상에서 마음껏 살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만 오면 남들이 다 받는 은혜는 혼자 못 받고, 남들이 안 받는 스트레스는 혼자 받습니다.
여기에서도 치이고 저기에서도 치이니 어디에 가나 재미없습니다.

요컨대 이때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사는 것과 가나안에서 사는 것을 비교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파생된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파생된 것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괜히 예수 믿었다’는 불평도 사실은 아직 신앙 수준이 저급하기 때문에 생긴 불평입니다.
그런 불평을 하지 않으려고 교회를 멀리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예수 믿는 재미를 만끽해야 합니다.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백성들은 전부 안절부절못하는데 모세는 상당히 의연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출애굽기에 등장할 때부터 이처럼 의연한 모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거듭해서 소명을 거부하다가 마지못하여 수락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중에도 일이 순조롭지 않자, 하나님께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3장에서 6장까지의 모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랬던 모세가 본문에서는 믿음의 용장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7장부터 13장에 나오는 내용을 통하여 모세의 신앙이 이만큼 자랐다는 뜻입니다.


7-13장에는 열 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모세가 이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와! 하나님이 이런 분이로구나!”라는 사실을 모세가 생생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그리 단순한 얘기가 아닙니다.
열 가지 재앙을 체험한 것은 모세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업 분위기가 안 좋을 때 선생님이 가장 떠드는 학생을 불러내어 매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매를 맞지 않은 다른 학생들도 전부 조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매를 맞은 학생은 여전히 히히덕거리는 법은 없습니다.

바로가 그런 격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가장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은 모세보다 오히려 바로입니다.
그런데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모세는 하나님을 알았는데 바로는 여전히 완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연히 바로를 미워해서 바로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멸망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도 범죄합니다.

특히 본문의 내용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는 것을 마치 신앙의 경지인 양 얘기하는 것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왜 네가 나서서 하려고 하느냐? 하나님께 맡겨라.”라는 얘기를 초신자들이 하지 않고 신앙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보다 직접 시험 보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선생님은 없습니다.
누가 시험을 봤든지 무조건 시험을 본 결과만 갖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신앙이 더 좋은 것인 양 착각하는 예가 상당히 흔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아닌게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구절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봐라, 왜 공연히 우왕좌왕하느냐? 아무 염려 말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라고 하면 반박할 말이 언뜻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 군인들이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모세가 얘기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서 애굽을 탈출한 사건은 죄의 종이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실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化)로 설명합니다.

칭의는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수준은 여전히 죄의 종이기 때문에 수준도 하나님의 자녀다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칭의는 예수를 믿는 것이고 성화는 예수를 더 잘 믿는 것입니다.
영화는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육신 장막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칭의 단계에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구원은 은혜로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에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칭의를 상징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 얻은 신분으로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대신해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공부는 학생이 해야 하는 것처럼 거룩은 우리가 연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되 신앙 생활을 대신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신자들 중에 칭의와 성화를 혼동해서 구원은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얻었고, 실제 신앙 생활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법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고 신앙 생활은 우리가 악착같이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얘기나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얘기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드디어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입니다.
모세의 기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내용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을 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중에 홍해가 갈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있습니다.
‘밤새도록’과 ‘마른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되, 갑자기 ‘쨘!’하고 가르신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밤을 새는 것은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낮 시간 동안 공부한 분량만으로는 시험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밤을 샙니다.
또 애가 아프면 어머니가 옆에서 간호하느라고 밤을 샙니다.
아이 대신 앓을 수만 있으면 당장 대신 앓기라도 하겠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애를 태우면서 밤을 샙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밤을 샐 이유가 없습니다.
“홍해는 갈라질지어다!”라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밤을 새셨습니다.
고열로 고생하는 아이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느라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그토록 노심초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극한 보살핌에 따라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바다가 갈라졌으면 그 사이에 생긴 길은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고 땅도 질퍽거릴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종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전남 진도나 경기도 화성군 제부도 등에서 바닷길이 드러나는 해할(海割)현상이 생기곤 합니다.
해할(海割)현상은 퇴적으로 쌓인 모래톱이 썰물 때에 드러나는 단순한 현상입니다.
봄가을에 간만의 차가 심할 때 주로 나타나는데,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다가 열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반대방향으로 불면 짧아집니다.
하지만 그 어떤 해할(海割)현상도 바다 사이에 마른 땅이 생기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상이나 기대보다 훨씬 더 큽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널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감지덕지했을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물론이고, 그 발에 애굽의 때도 묻지 않게 보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은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는 홍해 사이로 난 길로 이스라엘을 뒤쫓다가 전부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길을 열었던 홍해가 애굽을 위해서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을 위해서 길을 닫아버렸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면서 은혜만 받아 누리려는 시도를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통로를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모세는 하나님 쪽으로 진일보(進一步)한 반면 바로는 같은 체험을 했으면서도 전혀 변화하지 않았음을 앞에서 확인했습니다.
모세는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홍해 앞에서도 의연했는데 바로는 여전히 완악한 중에 있다가 홍해에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수두룩한 엑스트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모세가 하는 얘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했으니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만 이때 이스라엘이 보인 반응은 앞에서도 한 번 나왔던 반응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4:29-31)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했을 때의 얘기입니다.
아마 그때 모세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모세가 하는 얘기를 믿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가 이스라엘을 순순히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압제하자, 금새 태도를 바꾸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지어는 열 가지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각별한 보호를 입었으면서 홍해 앞에서는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모세를 헐뜯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직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이런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그들은 이제 곧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불평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위해서 가나안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많이 있는 모습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체험하기는 했습니다만 모세처럼 담대한 신앙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악 중에 죽어간 바로처럼 강퍅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자기에게 유리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불리한 일이 있으면 원망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기업을 예비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