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5장 15장에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과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감격이 있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일 같은데, 찬양 내용이 조금 어색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악의 소굴에서 건져주셨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찬양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애굽을 어떻게 심판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기들이 얻은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이 받은 심판을 찬양합니다. 요컨대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의 문제입니다. 구원은 한꺼번에 영화스러운 신분으로 변모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몰살시켰다는 얘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의 세력을 굴복시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내용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찬양 내용은 전부 같은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애굽을 몰살시켰다’는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본래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연속극이라도 재방송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감격적인 사건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축구 중계에서 골인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반복해서 봐도 볼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이때 느린 화면은 각도를 달리해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애굽을 홍해에서 멸하신 사건을 반복해서 거론하는 것이 같은 맥락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이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혹시 우리 인생에 찬양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죄와 분리되었던 경험이 없는 탓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면 하나님을 찬양할 겨를이 없게 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를 만큼 둔감한 사람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이방 잡신에게는 위엄이 없습니다. 없는 위엄을 억지로 가장하려면 규모를 크게 해야 합니다. 팔뚝만한 불상보다는 집채만한 불상에서 더 큰 영험을 기대하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정해진 공간에 점잖게(?) 좌정하여 무게를 잡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위엄이 있고,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습니다. 15:14-16>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애굽을 멸하신 사건은 주변의 모든 족속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소식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영솔하여 가나안에 입성하기 직전의 일입니다. 먼저 여리고성에 정탐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무려 40년이 지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 거민들은 그때까지도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일을 기억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수2:9-10). 그런데 유독 아말렉은 이런 하나님의 위엄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은 곧 죄를 상징하는 족속입니다. 이 내용은 17장에 나옵니다. 15:22-23>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이 그 사이로 마른 땅을 건너서 애굽을 탈출하는 내용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신나는 내용입니다. 하물며 당시 이스라엘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체험을 한다면 평생 예수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놀라운 체험을 했으면서도 한낱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고작 사흘만에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이스라엘은 참 한심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마라’라는 지명은 본래부터 있던 지명이 아닙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이 물이 쓰다는 이유로 불평을 하면서 그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곳의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마라’가 더 유명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라의 물은 계속 쓴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물이 달아져서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방금 전까지 써서 마시지 못하겠다고 불평하던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물만 마셨을 뿐, ‘마라’라는 지명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물이 쓴 물에서 단물로 바뀌었으면 ‘우리가 방금 마라라고 했는데 이제 보니 마라가 아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물이 달아진 다음에도 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은 잔뜩 늘어놓으면서도 감사할 일은 그냥 넘어갑니다.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떤 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바뀌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무에 신비한 영험이 있었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가 무슨 나무였는지는 몰라도, 혹시 하나님께서 다른 나무를 지시하셨으면 다른 나무를 통하여 물이 달아졌을 것입니다. 나무 자체에 쓴 물을 단물로 바꾸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기’는 물론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것을 체험한 곳입니다. 물을 마실 수 있는지의 여부가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달려있음을 체험하게 한 바로 그 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면 ……하겠다’라는 말을 뒤집으면 ‘……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마냥 중립적인 위치에서 보기만 하다가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이렇게 하시고, 우리가 저렇게 하면 하나님도 저렇게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용돈 올려준다’는 얘기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용돈을 올려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여부를 아무런 감정 개입 없이 지켜보기만 하다가 용돈을 올려줄지 여부를 나중에 판단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용돈은 얼마든지 올려줄 테니 제발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주겠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니까 잘 알아서 너희 마음대로 해라’라는 뜻이 아니라 ‘꼭 그렇게 해서 그런 복을 누려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마라에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쓴 물도 달아져서 마실 수 있게 된 바로 그 곳에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에게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광야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물만큼 반가운 것은 없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아시스에 가면 물도 있고 시원한 그늘도 있습니다. 엘림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 내용을 문맥을 따라 확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마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한 다음에 거기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너희가 앞으로 내가 정한 법도와 율례를 잘 지키면 너희는 이런 것을 누리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을 그들에게 얼마든지 엘림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때의 엘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어느 만큼 복된지를 체험하게 하는 일종의 ‘맛 뵈기’입니다. 맛 뵈기가 엘림이라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의 실체는 어느 만큼 좋은 것인지 이루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다음에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