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장


출애굽기 20장





20장은 십계명이 있는 장인데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라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인 셈입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영광이 가장 잘 나타나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우주만물을 지으신 일을 꼽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가장 큰 일은 천하만물을 창조한 일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일입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나는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이다’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는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하십시다.
아버지와 같이 길을 가는데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 친구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나라의 대통령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다’라고 합니다.
자기와 같이 있는 사람이 어느 만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어떤 관계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셔서 그것을 지키게 하신 다음에 그 대가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홍해부터 건너게 하신 다음에 십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율법은 ‘너희가 이것을 지키면 구원해주마’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구원 얻은 사람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계명은 굳이 길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라.”라는 것이 계명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고3생에게 “너는 수험생이다. 수험생답게 생활해야 한다.”라고 하면, 여기에는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잠을 줄여야 하고, PC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노는 시간을 줄여야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뭉뚱그린 표현이 ‘너는 수험생이다’라는 표현입니다.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나를 잘 섬겨야 한다’라는 한 마디면 족한데, 열 가지씩 열거되어 있습니다.
결국 십계명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세부 시행 규칙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이 내용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길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우상을 만들 리가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리가 없습니다.
물론 안식일도 거룩하게 지킬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을 할 리가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도적질을 하거나 거짓 증거를 할 리가 없습니다.

세 살 박이 꼬마한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하면 세 살 박이 꼬마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뭐야?’라고 할 것입니다.
세 살 박이 꼬마는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이지를 모릅니다.
그러면 사이좋게 노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줘야 합니다. - “응,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먹을 것이 있으면 친구와 나눠 먹고, 장난감은 같이 가지고 놀고, 친구와 싸우지 않는 거야.”

십계명이 바로 그렇습니다.
창세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11번 나오는데, 그 11번이 전부 사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상으로 해서는 한 번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웃 사랑’의 개념은 있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11번 모두 부모, 자식이나 남녀 사이에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해봐야 그 얘기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계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키면 본전이고 못 지키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신호를 위반하는 차량을 적발하는 교통경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복과 유익을 위해서 아들까지 주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지키면 본전이고 못 지키면 벌을 받는 계명을 주실 리는 없습니다.

십계명 중의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계명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본래 신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수두룩한 신 중에 하나님이라는 신을 택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일신(唯一神)입니다.
하지만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그때마다 다른 신을 섬겨야 합니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으면 삼신할미에게 치성을 드려야 하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갈 적에는 풍랑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용왕께 빌어야 하고 산삼을 캐러 갈 적에는 산신령께 고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에 보면 상당히 많은 신이 나옵니다.
신이 많다는 얘기는 그 모든 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신마다 주특기가 있어서 자기가 맡은 고유 영역에 대해서만 힘을 쓸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고기를 잡는 사람이나 전쟁을 하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신의 필요를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종종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녀들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의사 아들, 교수 아들이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범법행위를 하는 이유는 집에서 용돈을 주지 않는 탓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말하기 곤란한 용도에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 몰래 일을 꾸미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신이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미 불신앙입니다.

중․고등부를 지도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교육관에 들어갔더니 저희들끼리 둘러앉아서 뭔가를 얘기하던 학생들이 갑자기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었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려던 차에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얼른 말을 막았습니다.
“안돼, 목사님 알면 우리 혼나.”
그 얘기에 모두들 웃었습니다.
목사님 알면 혼나니까 말하지 말라는 얘기를 내 면전에서 한다는 얘기는 그렇게 심한 잘못은 아니라는 뜻입니다만 그 얘기를 듣고는 제가 짐짓 정색해서 나무랐습니다.
“이놈들아, 내가 알아서 혼날 일이면 나 몰래 일을 꾸밀 게 아니라 차라리 들켜서 혼나고 그 일을 하지 않는 게 너희들한테 유익 아니냐? 내가 너희들과 같은 편이 아니면 나 몰래 다른 일을 꾸미라만, 내가 너희들과 같은 편이면 차라리 자수해서 혼나는 것이 잘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유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라도 자기 욕심을 이루는 것이 복이고 유익인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만 섬겨라. 그것이 너희에게 복이니라.’라는 내용이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20: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본래 형상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서 신의 형상을 만들면 어떤 것을 만들겠습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기네가 섬기는 신을 만든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사지선다형으로 생각해보십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신을 만들면 어떻게 만들겠습니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 독수리 형상으로 만들 것이다.
② 소의 형상으로 만들 것이다.
③ 뱀의 형상으로 만들 것이다.
④ 큰 나무의 형상으로 만들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보기가 주어진다면 전부 ②를 꼽을 것입니다.

신의 형상을 만든다는 얘기는 자기들의 욕심을 극대화하여 표현한다는 뜻이 됩니다.
신의 존재가 인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또 신의 형상을 만들면 그 신은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됩니다.
법당에 있는 불상에서 단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불상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앞에서 옷깃을 여밉니다.
하지만 문밖을 나서면 그만입니다.
거기는 불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앞에서는 열심히 자기의 욕심을 쏟아놓고 돌아서면 그것으로 끝일 것입니다.


20:24-25>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이런 말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 성막을 만들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성막이 있으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되는데 성막이 있기 전이니까 하나님을 섬길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단은 흙으로 만들어도 되고 돌로 만들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단을 만드는데 있어서 형식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에 관계없이 단이면 됩니다.
요컨대 하나님만 예배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20: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성경에는 참 별 얘기가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단에 오를 적에 층계로 오르지 말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대체 이런 얘기가 왜 필요합니까?
층계로 단에 오르지 않으려면 층계만 없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층계가 있어야 오를 수 있을 만큼 큰 단을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단을 만들다 보면 기왕이면 크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단을 크게 만들면 제단에 오르기 위한 층계가 있어야 하는데, 층계를 오르내리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흉한 모습을 보일 우려가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의 복장은 통으로 된 원피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세한 문제까지 자상하게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이유로 단을 크게 만들었다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예배를 방해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향한 의욕이 넘쳐서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혹시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면 옳지 않습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느냐는 얘기가 있습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장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면 구더기조차도 무서워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