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장


출애굽기 21장





21장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비단 종교적인 영역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 관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것이다’라고 시시콜콜하게 얘기합니다.

2-6절에는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샀을 경우에 대한 규례입니다.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부릴 때는 6년 동안만 종으로 부리고 7년에는 풀어줘야 합니다.
제 7년은 안식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6년 종살이를 하는 동안에 장가를 들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살이를 하는 동안에 장가들었다는 얘기는 주인집에 있는 종과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풀려난다고 해서 주인의 재산인 자기의 아내까지 같이 풀어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자식을 낳았으면 그 자식도 주인의 재산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종은 처자와 헤어져서 자유의 몸이 되든지 혹은 처자와 같이 살면서 계속 종으로 지내든지 자기 의사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을 선택해서 혼자 집을 나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만 혹시 처자와 헤어지기 싫어서 계속 종으로 지내기를 자원하면 송곳으로 귀를 뚫어야 했습니다.
신분은 자유인입니다만 처자와 함께 지내고 싶어서 스스로 종을 자청한 것에 대한 표징입니다.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자기 가족을 사랑했던 히브리 종이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으면서도 그 신분을 포기하는 징표로 귀에 송곳 자국을 남겼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 모든 하늘 영광을 기꺼이 버리시고 그 징표로 손에 못 자국을 남기셨습니다.


12-17절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그런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피다가 그런 사람이 발견되면 전부 잡아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시 자기에게서 그런 행위가 나타나면 자기 스스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셈이라는 뜻입니다.


21:14>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


군대에서 사병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였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군 기강 확립 차원에서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만 감정이 격해지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싸우는 중에 갑자기 사단장이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조건 ‘동작 그만’입니다.
아무리 분이 풀리지 않았어도 사단장이 보는 앞에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하나님의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보다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를 없애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사단장이 보는 앞에서 계속 싸운다면 사단장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인간은 반드시 잡아죽여서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가 왕위를 탐했을 때의 일입니다.
사태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은 알아챈 아도니야가 화급하게 제단 뿔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행위였는지 혹은 성스러운 곳에 몸을 피함으로써 생명을 구하려고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하여간 목숨을 구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무조건 보호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에 하나님의 보다 큰 관심이 있습니다.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를 가리켜서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이 과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냐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하여간 중요한 개념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해서 복수를 정당화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나 통용됨직한 내용이 버젓이 성경이 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너의 눈을 상하게 하거든 용서해라, 이를 상하게 해도 용서하고, 손이나 발을 상하게 해도 용서해라.”라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도 예전에는 성질깨나 있으셨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많이 너그러워지셨다’라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결국 본문의 내용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에 맥이 닿는 내용입니다.
가장 협소한 의미의 사랑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았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뺨을 맞은 사람이 어떻게 복수하겠습니까?
자기가 어느 만큼 아픈지를 계산해서 자기가 느낀 통증만큼 복수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힘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복수합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했으면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눈물을 흘렸으면 상대방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사람의 심보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감정이 적개심이면 안 됩니다.


21:33-34>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고의성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고의성이 없으면 벌이 가볍지만 고의성이 인정되면 벌이 중한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의성만 없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정을 파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잘못인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덩이를 덮지 않은 것도 잘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책임 아니야, 난 몰랐어.”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이웃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