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2장

출애굽기 22장





22장은 21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내용으로 히브리 사람들의 사회 규범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한 규례들인데, 특히 1-15절은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규례들입니다.

소유권을 보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십계명 중의 열 번째 계명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유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입니다.
그런데 다시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소유욕은 ‘남의 소유를 탐내면 안 된다’라는 말 한 마디로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에게는 소유욕이 없습니다.
만일 짐승들에게도 소유욕이 있다면 밀림에서 만난 호랑이끼리 대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호돌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
“말 마라,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먹고살기 힘들다.”
“어떻게 지내는데?”
“지금까지 모아놓은 것이 멧돼지 12마리하고 사슴 37마리밖에 안 된다. 부양가족은 점점 늘어나는데 큰일 났다.”
만일 호랑이들이 이런 대화를 한다면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소유욕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유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자에게는 식욕이 없습니다.
사람이 그만큼 고고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병리적인 현상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소유욕이 없었으면 오늘날과 같은 물질문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유욕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에 대한 욕구를 느낀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자기의 감정대로 처신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바른생활 교과서가 아닙니다.
남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기 이전에 신앙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지갑에서 돈을 무제한 나눠줄 수는 없습니다.
지갑에는 6만원뿐인데 모인 사람은 열 명이라면 일곱 번째 사람에게는 줄 수 없게 됩니다.
일곱 번째 사람에게도 만원을 주려면 누군가에게서 이미 지급된 만원을 회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신 분입니다.
나에게 주실 복이 모자라서 남에게 있는 것을 빼앗아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영구차를 보면 재수가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구차와 그 날의 운세에 대한 상관관계’라는 제목의 논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영구차를 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그런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라 단지 말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가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라면 그 얘기에는 생명력이 없어야 합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듣는 사람이 그 얘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칙입니다.
영구차가 운행된다는 얘기는 누군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가정에 슬픔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행복의 총합이 제한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있는 슬픔이 찾아왔다는 얘기는 자기에게 기쁨이 찾아올 확률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근저에 있는 공통적인 심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한적인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더 가졌기 때문에 자기 몫이 줄어드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있는 소유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남에게 손해를 입히는 행위는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의 일입니다.
나단이 다윗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이 많고 가난한 사람은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 손님이 오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했을 때, 다윗은 그 사람이 빼앗아간 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1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양을 도적질한 사람은 네 배로 변상하고 소를 도적질한 사람은 다섯 배로 변상해야 했습니다.
죄질에 따른 가중처벌입니다.
양은 그 당시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가축이었지만 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혹시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배상해야 했습니다.
죄는 흐지부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22:18-20>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찌니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배상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상으로 끝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본문은 특히 그 처벌이 엄격한 죄의 목록입니다.

무당은 살려두면 안 됩니다.
자기만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그것으로 자기의 책임이 전부 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변을 ‘우상을 섬기면 안 되는 분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무당을 찾아가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도 자기 책임입니다.

짐승과 더불어 행음하는 자도 죽여야 합니다.
수간(獸姦)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운 단어입니다.
하지만 수간하는 사람을 죽이라는 얘기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런 사람은 당장 죽여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서로 교제하다 사이가 멀어지면 가장 먼저 자기가 받은 선물을 훼손할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곰 인형을 쓰레기통에 던지기도 하고 신발을 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왜곡된 성 문화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더럽히는 행위가 성 문화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수간만이 아니라 동성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또 두 번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하라는 얘기는 이 두 계명을 더욱 확대한 것입니다.
자기만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안 됩니다.
신앙은 최대한 적극적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22:21-24>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중에 ‘하나님은 약자 편’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약자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편일 뿐입니다.
우리가 궁금하게 여겨야 할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이 과연 누구 편을 드느냐?’가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을 들고 있느냐?’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약한 자는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철이나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소경 거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저 거지가 정말로 소경일까? 혹시 소경도 아니면서 소경인 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소경이 아니면서도 소경인 척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트집 잡지 말고 그냥 속아 주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소경인 척이라도 해서 돈 몇 푼을 얻어 가야 그 날 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인색함을 감추기 위해서 소경이 아닌 증거를 찾는 것은 상당히 고약한 버릇입니다.
진짜 소경이면 주고 가짜 소경이면 안 줘도 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의 여부에 관계없이 불쌍하면 주십시오.
소경인 척하는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고 가증하게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有司)를 저주하지 말찌니라


재판장이나 유사는 복종의 대상이지, 판단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나 유사가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재판장을 욕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저주를 받는 유사라면 유사의 자격이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재판장을 욕하거나 유사를 저주할 때는 신중해라’라고 하지 않고, 그런 일을 엄히 금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이나 유사가 판단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일반 백성들은 복종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현실적인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운영에 대하여 저에게 건의를 할 수 있습니다.
제 의견과 다른 의견을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정을 내리면 설명 제가 내린 결정이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제가 내린 결정이 여러분의 의견보다 비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곳이 아니라 신앙 인격의 완성을 위한 곳입니다.
재판장이나 유사를 욕하거나 저주하지 말라는 얘기가 그런 얘기입니다.


22: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찌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찌며


빚을 갚기 싫어서 뭉그적거리는 것은 별로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귀속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인색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율법에 속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면 되는데, 왜 꼭 율법적인 헌금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성경을 어느 만큼 알아서 하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논리적으로 맞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성경적인 봉헌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색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색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인색한 것은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찌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찌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세부 실천 항목으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풍토에서는 이런 내용이 쉽게 공감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무엇을 먹을까?’보다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성경에서 금하지 않더라도 짐승에게 찢긴 고기를 탐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규례가 선포될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만나 외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대였습니다.
혹시 꿩을 뜯던 매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다면 매가 먹던 꿩은 훌륭한 보양식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에는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을 수 없는 짐승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혹시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이 부정한 것으로 분류된 짐승이라면 별 수 없지만 정한 짐승이라면 “봐라! 이것은 율법적으로도 먹을 수 있는 거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미리 못을 박습니다.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는 먹지 말고 개에게나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매사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비단 무엇을 먹느냐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정한 수입에 마음을 두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서울 시내의 아파트 값은 정상이 아닙니다.
모든 재화는 그 재화가 제공하는 경제적인 가치에 맞게 가격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서울 시내의 아파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집은 주거 공간이지,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아파트를 사두면 돈이 된다’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냐?’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차라리 돈을 덜 벌더라도 집을 두 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여러분은 제발 ‘돈만 있으면 땅 좀 사둘 텐데…… 그러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 돈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제가 돈이 있으면 땅을 사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얘기한 이유는 그렇게 해봐야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렇게 하면 돈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얘기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더라도 돈만 벌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어차피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려면 돈을 택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라는 뜻입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도 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에게 찢긴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이방인들은 관계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짐승에게 찢긴 고기를 먹지 않는 고결한 삶보다 짐승에게 찢긴 고기로 배를 채우는 포만감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래도 그렇게 하면 돈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