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3장 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교회 밖에서는 쓰지 않는데 교회 안에서만 쓰는 용어가 더러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구속’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구속의 은총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본래 구속은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어떤 노예가 구속되었다는 얘기는 전 주인에게서 풀려나서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속받았다’는 얘기가 그런 뜻입니다. 전에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주인이 생겼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친히 주장하시는 내용입니다. 전에는 바로가 이스라엘의 주인 행세를 했는데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주장하실 것입니다. 이런 내용에 이어서 장차 가나안에 가게 되거든 유월절 예식을 지키고 또 초태생은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월절 예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교병 대신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발효되지 않은 가루로 빚은 떡이 맛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떡을 먹어야 합니다. 심지어는 집안 어디에서도 누룩이 눈에 띄어도 안 됩니다. 또 초태생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거나 혹은 나귀의 목을 꺾어야 했습니다. 그런 예식을 행함으로써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행위와 사고의 기준을 삼으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원을 얻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의식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예식을 행하면 집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영문을 물을 것입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맛없는 떡을 먹어야 합니까? 또 왜 나귀 새끼가 태어나면 양 한 마리를 죽여야 합니까?” 그러면 그때 대답을 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애굽의 종으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런 예식은 애굽에서 나가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애굽에서 나간 다음에 이런 예식을 행하면 얘기가 고약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나간 다음은 가나안이 아니고 광야입니다. 광야에서의 삶은 애굽에서의 삶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생활이 여전히 고달픕니다. 그런 고달픈 생활 속에서 무교병을 먹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 오늘은 왜 이렇게 맛없는 떡을 먹어야 합니까?” “우리가 전에 애굽의 노예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우리가 이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 때문이란 말입니까? 저는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애굽으로 보내주십시오.” - 아마 이런 대화가 전개될 것입니다. 요컨대 절기는 가나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에 흐르는 젖과 꿀을 누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절기를 지켜야 절기를 지키는 것이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얘야, 우리가 지금처럼 풍성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란다. 우리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해야 설득력이 있습니다. 유월절이 아무리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해도 가나안에 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예수 믿기 전보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을 때보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게 됩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푸념 중에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3초 전에 믿을 걸 그랬다”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예수를 믿는 맛을 모르니, 세상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 재미도 누리지 못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기쁨’을 아무리 얘기해봐야 입만 아픕니다. 각설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동안에는 유교병을 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유교병을 먹으면 이스라엘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출12:15). 유교병을 먹은 것이 뭐 그리 큰 죄라고 그렇게 심한 처벌을 내리겠습니까?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즉 유교병을 먹는다는 얘기는 죄에서부터 구원 얻었으면서도 죄와 함께 지내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지도를 통해서보면 애굽과 가나안은 그리 먼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경로가 아닌 먼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가까운 길은 이미 블레셋이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미 철기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직 청동기문화였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면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출애굽 자체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일부러 블레셋을 만나지 않도록 우회해서 인도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 육십만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나안으로 통하는 길을 아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어? 저리로 가면 길이 없는데……, 왜 멀쩡한 길을 놓아두고 광야로 가나?” 하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끔 모르는 것이 있어서 우리가 가르쳐드려야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사실까지도 아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어느 만큼 식견이 뛰어난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13:19>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모세가 애굽을 나오면서 요셉의 해골을 챙겨서 나왔습니다. 일찍이 요셉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유족들에게 이 다음에 가나안으로 가게 될텐데, 그때는 자기 유골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바 있습니다(창50:25). 요셉은 애굽에서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보다 유골이나마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에 묻히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그런 유언을 하니까 모세가 그렇게 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요셉과 모세가 동시대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보낸 기간이 430년입니다. 그 430년의 어느 시점에서 요셉이 그런 얘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여간 요셉이 그런 얘기를 한지 대략 360년만에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요셉이 했던 얘기를 기억하고 그 얘기를 준행했습니다.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도 60만 명이 넘는 대부대를 영도하여 애굽을 나오는 모세가 챙긴 재산목록 1호가 ‘요셉의 뼈다귀’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세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썩을 유골이 어느 땅에 묻힌들 그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문제입니까? 혹시 챙겨가더라도 다른 것을 다 챙기고 제일 나중에 챙긴다면 모를까, 가장 먼저 챙길 물건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그것이 가장 소중했습니다. 요셉의 유언이어서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와! 그렇구나. 하나님의 약속은 정녕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사실이 소중한 것입니다.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이제 바야흐로 애굽을 출발합니다. 애굽에 있을 적에는 애굽의 노예였지만 애굽만 벗어나면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애굽 밖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어떤 경로로 가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은 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으로 구원이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예수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으로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무릇 신앙 생활은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는데,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두고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지금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옛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외면하더라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