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장

출애굽기 16장





16장에는 이스라엘이 신 광야에 이르자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만 해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14:31).
15장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자, 금새 태도를 바꾸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라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었습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애굽에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왜 자기들을 꼬드겨서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요즘말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재미있게 잘 살고 있는 자기를 왜 예수 믿게 해서 이렇게 고달프게 만드느냐는 뜻입니다.
혹시 ‘책임지라’는 표현을 썼으면, 그때의 책임은 예전에 자기가 즐기던 재미를 보상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예전보다 더 재미있어지면 무방하지만 예전보다 재미없어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가 ‘예수’가 아닌 ‘세상 재미’인 사람들에게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얘기입니다.


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盧嗔?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뜻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좋다, 너희가 그렇게 배가 고파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부터 양식을 내려주겠다’라는 내용은 납득이 되는데, ‘이같이 하여 너희가 과연 나의 율법을 지키는지의 여부를 내가 확인해보겠다’라는 내용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동안 먹은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심거나 거둘 수 없는 환경에 놓였을 적에 하나님께서 친히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주셨습니다.

하지만 만나에 담겨있는 뜻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문맥에 따라 차례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15장에서 이스라엘은 마라에서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체험하게 한 다음에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지를 확인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결국 이때 이스라엘의 불평은 “하나님, 저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저희라고 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즐겁겠습니까?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말씀대로 살고 싶어도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말씀대로 살 것 아닙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결국 이때의 만나에는 “너희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다만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라고 했느냐? 좋다, 그러면 너희들이 먹고사는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과연 너희가 말하는 것처럼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말씀대로 사는지 확인해보자.”라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요컨대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의사가 있는데 주변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범죄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얘기였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다만 ‘범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정 그렇다면 너희 주변 환경은 내가 책임지마. 그렇게 해서 과연 너희의 부패한 심성이 문제인지, 너희 주변 여건이 문제인지 확인해보자.”라는 뜻입니다.

수학능력시험만 끝나면 교회 열심히 나오겠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생 치고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에 교회 나오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얘기를 하는 학생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지금은 수학능력시험만 끝나면 간다고 얘기해두자. 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다른 핑계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수학능력시험만 끝나면 갈 마음으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학능력시험 전에는 수학능력시험 때문에 교회 못 나왔던 것처럼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다음에도 그런 핑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친구들과 놀러 가기도 해야 하고 소개팅도 해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고 늦잠도 자야 합니다.

죄는 환경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에덴동산에서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된 곳에서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16: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내셨음을 알 것이요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라는 뜻인 것 같은데 ‘저녁이 되면’이라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는 저녁에 내리지 않고 아침에 내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얘기는 만나라는 단편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정녕 하나님이구나!”라고 감탄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루일과를 마친 다음에 그 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맞기는 맞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봤지? 내가 너희를 위해서 홍해를 갈랐다. 나는 내 할 일 다했다. 이제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가나안까지 가거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홍해를 가르신 분이 정녕 하나님이라면 그 후의 여정도 계속 인도하실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에게 벌어지는 일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면 자기들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첫 발을 디딘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우연히 교회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앞으로의 모든 행보에도 간섭하시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 속에서 전개되는 일을 보면서 예전에 자기가 교회를 찾은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는 것이 과연 자신들의 죄성에 기인하는 것이냐, 환경에 기인하는 것이냐를 얘기하기에 앞서 현실적으로 만나는 사십 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의 양식이기도 했습니다.


16:26-30>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만나는 매일 아침에 내렸습니다.
백성들을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제 육일에는 갑절의 만나를 거두었습니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이독경이었습니다.
물론 만나는 아무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제 육일에 갑절의 만나를 거두었으니 양식이 없어서 거두러 나간 것은 아닙니다.
먹고사는 문제 이전에 탐욕의 먼저였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이유는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만나조차도 이스라엘에게는 욕심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28절의 지적처럼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 “너희들, 정말 너무한다.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제 육일에 갑절의 만나를 내리면서 제 칠일은 안식일이니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언제까지 내 말을 안 들을 셈이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전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 일 이후로 백성들이 제 칠일에 안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는 안식하라’라고 말씀하신 사실만으로 안식한 것이 아니라 ‘제 칠일에는 나가봐야 헛수고로구나’라는 사실을 체험한 다음에야 안식했습니다.
아마 제 칠일에도 만나를 얻을 수 있었으면 그들은 유황불로 심판받는 한이 있어도 안식일을 범했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은 기간은 사십 년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에서 보내는 모든 기간 동안 만나를 먹으며 지냈습니다.

광야는 농사를 지을 여건이 안 되는 곳입니다.
비단 땅이 척박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계속 옮겨 다녔기 때문에 자기가 심은 것이 있어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자기가 심으면 심은 만큼 거두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는 만나를 주셨지만 가나안에서는 만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은 심고 거두는 것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책임을 대신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책임을 외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할 만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은혜이지,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해주는 은혜가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를 박살내고 홍해를 가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에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곱게 안아서 한꺼번에 가나안으로 옮겨주신 것이 아니라 아무리 광야 길이 거칠고 험해도 이스라엘이 자기 발로 걸어서 가나안에 가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과 그런 은혜를 입고 있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은 늘 구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