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7장
출애굽기 17장
17장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물이 없어서 불평할 때 반석에서 물이 나왔다는 내용과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웠다는 내용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거기에 장막을 쳤는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전부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였느냐?’며 불평한 것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과거의 일이고 자기들을 기다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미래의 일입니다만 광야 생활은 현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애굽의 노예였지만 지금은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에서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별 수 없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의 행보를 정한 것이 아니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라서 길을 정했습니다.
이들에게 마실 물이 없는 것은 우발적인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물이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뭔가 전할 메시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당장 마실 물이 없다는 사실만 문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물이 없는 상황을 해결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그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4)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것은 장차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로 초대하실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때의 시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봐라! 너희가 범죄하는 것은 너희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 내부에 있는 죄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환경만 좋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자기들 중에 계신지, 계시지 않은지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물이 없다며 아우성을 부린 것은 하나님이 과연 자기들의 말을 들어주는지 여부를 시험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철없는 애들이 용돈을 올려 달라며 밥도 안 먹고 방에서 안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이때 이들의 행동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엄마가 용돈을 안 주겠어?’라는 속셈에 기인한 행동입니다.
자기가 심통을 부리면 용돈을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그 엄숙한 순간에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고작 그런 짓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은 ‘전쟁 발발 시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신 다음에 아말렉과 맞닥뜨렸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뒤집으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지 않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지 않았으면 아말렉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실 수 있는 이유는 홍해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지 말고 그냥 애굽의 종으로 있었으면 배고프다거나 목마르다고 불평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물론 만나로 배를 불리고 반석에서 나온 물로 목을 축이는 일도 없었을 일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말렉을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아말렉이 애굽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은 애굽 군대가 막을 일입니다.
그런데 괜히(?) 홍해를 건넜다가 아말렉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아말렉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바람에 아말렉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아말렉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말렉은 곧 우리에게 있는 죄를 상징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기에게 죄 된 본성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야 자기에게 죄 된 본성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합니다만 우리가 죄라고 고백하는 내용들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들으면 “그게 왜 죄란 말이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사람만 죄를 죄로 인식합니다.
이때 모세는 여호수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싸움터에 내보내고 자기는 아론과 훌과 더불어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싸움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육체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기도를 시작하자 그것으로 아말렉이 지리멸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은 양팔을 들고 기도합니다.
모세도 팔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기도를 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기다가 팔이 피곤하여 기도를 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다가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그 팔이 내려오지 않게 했더니 결국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본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카이로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카이로까지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렸습니다.
기내에서 14시간을 가장 덜 지루하게 보내려면 잠을 자면 됩니다.
그래서 저도 잠을 청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카이로에 도착할 때까지 곤하게 잠들어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잠을 자려고 마음도 먹었습니다만 잠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때 다른 사람을 재우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는 잠인데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자기가 하지 못합니다.
모세에게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기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서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기도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기도를 쉴 때마다 동족이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모세의 마음은 아마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이때 모세 옆에는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모세의 기도를 대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정 힘들면 아론이나 훌과 잠깐 교대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화단에 물을 주는 것이 꽃을 위한 것이라면 누가 물을 주든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고운 심성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때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직접 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그와 같습니다.
누가 기도하든지 무조건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세가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일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성취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어느 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모되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모세의 팔이 피곤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은 아무래도 유감입니다.
여호수아가 피곤했다는 얘기는 없는데 모세가 피곤했다는 얘기만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기도를 했습니다만 여호수아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는 현장에서 직접 칼부림을 했습니다.
적어도 운동량으로 치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만 피곤해야 합니까?
이 내용이야말로 우리의 평소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육신에 속한 일은 넉넉히 감당하면서 영에 속한 일에 대해서는 늘 힘에 겨워합니다.
회사에서는 아니꼬운 일을 당해도 참으면서 교회에서는 못 참습니다.
돈을 위해서 간과 쓸개를 빼놓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여호수아는 늘 왕성하게 활동하는데 우리의 모세는 늘 기진맥진합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모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는데 기도 순서를 맡은 분이 ‘이제 저들은 선교의 일선에서 주의 복음을 들고 수고할 텐데 후방에 있는 저희들은 열심히 기도로 조력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은 목사님이 얘기했습니다.
선교 현장의 전방과 후방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면 여호수아는 거저 이기지 않았느냐는 것이 목사님의 논리였습니다.
기도에서 승리하면 남은 일은 전리품을 줍는 일뿐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하는 현장이 선교 일선이고 선교사들이 나가 있는 선교지는 후방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취지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읽어도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매 아말렉이 저절로 물러갔더라’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따른 이스라엘의 승리를 말하면서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하여 아말렉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궁극적으로 아말렉을 제압한 것은 여호수아의 칼이었습니다.
기도해서 힘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는 육체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그 다음에는 선교헌금이라도 해야 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옆집 사람에게 교회 가자는 말도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책임이 아니라 자기가 기도한 내용에 동참하는 것이 책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만 하면 됩니다’라는 메시지에 상당한 호감을 갖습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의 책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했으니까 그것으로 내 책임은 다 됐고 나머지는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법은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어떤 일을 대하는 우리의 원칙이나 자세지, 어떤 일을 이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기도와 여호수아의 칼 앞에 결국 아말렉이 진멸되었습니다.
17:14-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어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본래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고 원수조차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유독 아말렉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친히 천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라면 죄밖에 없습니다.
아말렉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말렉은 우리에게 있는 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어느 만큼 싫어하시느냐 하면, 그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실 만큼 죄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속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핑계로 자기의 불신앙을 용인 받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청년들을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가끔 들었던 말 중에 “목사님, 이런 문제는 좀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혹시 제 이해심에 대한 얘기라면 제가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 이해심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자기의 불신앙적인 소행을 눈감아달라는 뜻이면 제가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두들겨 패서라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에 대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추호의 양보나 타협도 없이 대대로 싸우십니다.
요컨대 교회 다니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텐데 교회 다님으로 인해서 생긴 고민이 있다면 그런 고민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 없이 단호히 무찌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신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멜렉을 도말할 마음이 있으시면 ‘온 천하에서 아말렉은 다 사라질지어다’라고 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대대로 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우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나는 아말렉과 싸우겠다.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데 우리가 손 놓고 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완성되는 날까지 힘써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았으면 관계없지만 혹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양식을 먹고 반석에서 나온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면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아말렉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