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3장


출애굽기 23장





23:1-2>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남들이 한다고 해서 덩달아 따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면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이 세상과 결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결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23:4-5>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기분 나쁘니까 화낸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에는 아무런 논리적인 모순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런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쁘면 화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야 합니다.
기분이 나쁜 것은 통제할 수 없어도 화를 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은 것을 보면 고소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소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 안 됩니다.
우리의 행동 근거는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3:10-12>
너는 육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제 칠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찌니라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얘기를 가장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주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하고 주일에는 근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킨다는 얘기는 요즘의 주일 휴무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 시대에는 요즘과 같은 직장이 없었습니다.
날품을 파는 노동자들이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얘기는 밥을 굶을 각오를 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얘기입니다.
주일예배를 빼먹지 않는 것으로 주일을 성수했다고 얘기하는 요즘 풍토와는 격이 다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안식년을 지키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너만 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땅도 쉬게 해야 한다.’라는 얘기인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신앙이 아니면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나 나귀나 종까지도 안식일을 지키게 했습니다.
자기만 안식일을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 환경을 안식일을 지키는 환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요즘은 주 5일 근무가 일반적이어서 주일을 지키기 어렵다고 합니다.
성경은 그 날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다음 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데 노는데 바빠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작금의 풍토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격세지감을 말하기에는 불신앙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23:14-17>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합니다.
3대 절기 때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야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적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했지만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방문하지 않고 유월(逾越 넘을 유, 넘을 월passover)했음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죄의 종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의의 자녀가 되어 구원얻었음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주일과 흡사합니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 보리를 드리는 절기인데 가나안땅의 경우, 연중 처음 수확되는 것이 보리이기 때문에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맥추절은 무교절을 지난 후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한 다음 날부터 지키기 때문에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했다는 뜻으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칠 주를 일곱 번 계수한 다음 날부터 지키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의 순(旬)이 열흘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통상 7월 첫 주를 맥추절로 지킵니다.

수장절은 초막절,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거두어들인 모든 수확물을 창고에 수장(收藏)하여 지키는 절기라는 뜻으로 수장절이라고 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초막(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절기를 지키는 기간 동안 초막(장막)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주일과 성격이 흡사합니다.

조금 유치하게 얘기하면 오랫동안 백수로 지내다가 마침내 취직하여 백수 신세를 면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초실절은 첫 월급을 받은 것에 해당합니다.
취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형편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첫 월급을 받기 전까지는 주머니 사정이 백수 때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수장절은 알뜰살뜰 적금 부어서 마침내 목돈을 마련한 것에 해당합니다.
첫월급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목돈은 아닙니다.
사실 첫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고작해야 부모님께 내복 선물하고 동생이나 조카에게 용돈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목돈을 마련하려면 직장 생활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눈꼴이 시어도 참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간과 쓸개도 빼어놓고 지내야 합니다.
적금을 붓기 위해서 불필요한 쇼핑도 자제하고 기분 내느라고 카드를 긁는 일도 삼가야 합니다.
그런 일을 어쩌다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꾸준하게 해야 돈이 모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분이 변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변한 신분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하여 그 첫 발걸음을 디딘 것이 전부일 수도 없습니다.
꾸준하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훗날 주님을 만났을 적에 “주님, 제가 세상에 있을 적에 이만큼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았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23: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


성경에는 언뜻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더러 있습니다.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얘기는 성경에 나올 만한 내용으로 보입니다만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얘기는 도대체 성경에 왜 이런 내용이 있어야 하는지 의아합니다.

우리 나라 음식에는 국물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가 역사적으로 가난했음을 보여줍니다.
양을 늘리려면 국물이 많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지가 넓고 먹거리가 풍부한 프랑스에서는 국물이 있는 음식은 하류 계층이나 먹는 음식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국물을 내되 물이 아닌 우유나 포도주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포도주를 국물로 사용할 경우에는 어떤 포도주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음식의 품격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어미의 젖으로 염소 새끼를 삶는 것은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염소 새끼에게 있어서 생명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어미의 젖으로 오히려 새끼를 삶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어미의 젖으로 삶은 염소 새끼가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자연 질서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일은 하면 안 됩니다.

5공 정권은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부도덕하게 출발한 정권입니다.
정권으로서의 정통성도 물론 없습니다.
단지 당시 어수선한 정국에서 가장 힘있는 자가 정권을 탈취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을 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가 그 일을 할 능력이 있느냐?’보다 ‘그 일이 이치에 합당하냐?’를 먼저 따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23: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


하나님께서 ‘너희가 A하면 내가 B하겠다’라고 하는 얘기는 A를 조건으로 해서 B를 허락하겠다는 얘기입니다.
A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B는 자동적으로 원인 무효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마냥 중립적인 위치에서 우리가 A를 하는지, 안 하는지 점검하시다가 그 결과에 따라 B를 허락하기도 하고,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집에서 아이에게 ‘1등 하면 컴퓨터 사주마’라고 했을 경우에, 아이의 평소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 시험이 끝난 다음에 성적표만 확인하지는 않습니다.
1등 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런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1등하는 것을 당사자인 아이보다 오히려 부모가 더 소원합니다.
컴퓨터가 생기는 것이 아이에게만 기쁨이 아니라 부모에게는 더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내가 너희 원수를 갚아주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같은 경우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원하십니다.


23:25-26>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본문은 ‘너희가 A하면 내가 B하겠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어떤 복을 누리게 되는지를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하지만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런 얘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굶주림에 시달릴 우려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배부르게 먹는 것이 복이고 질병의 고통에 노출된 사람에게는 건강한 것이 복입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다산(多産)이 상당한 복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느 만큼 좋은 것인지를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내용입니다.

국민들의 삶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만들어주는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국민적인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삶을 유복하게 만들어주는 왕이라면 당연히 그 왕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온갖 좋은 것을 다 마련해놓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면 하나님께서 왕벌을 보내어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릅니다만 실제 벌일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27절에 보면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27절의 위엄과 28절의 왕벌이 평행법으로 쓰였습니다.

성경에서 평행법은 종종 볼 수 있는 문장 기교입니다.
예컨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라고 할 때의 하늘과 땅은 실제의 하늘과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른 단어로 반복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왕벌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느껴서 두려워할 만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 원주민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조치를 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다음에 자기들은 가나안 원주민을 이길 수 없다며 가나안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작정한 영혼은 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