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4장


출애굽기 24장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본격적인 언약이 체결되는 내용이 24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앞으로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겠느냐?”라고 묻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3절에 보면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되어 있고 7절에도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왕이 칙령을 공포했는데 백성들이 그 내용을 확인하고서 “알겠습니다. 저희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앞으로 여기에 적힌 내용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법은 없습니다.
왕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방적으로 모든 일을 집행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 앞으로 이렇게 하겠느냐?” 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흔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만 신학적으로 따지면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보다는 구원을 얻으면 예수가 믿어진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구원에 대한 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꿔다놓은 보리자루로 만들어서 일방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동의를 수반하게 하십니다.
그 인격적인 동의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24:4-6>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단을 쌓고 피를 뿌렸습니다.
피를 뿌린다는 얘기는 일차적으로 ‘이 언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신 언약이라고 했으니까 언약의 주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만일 언약의 주체가 이스라엘이면 이때 피를 뿌린 것은 “좋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반드시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 만일 저희가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지금 피를 뿌리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도 피가 뿌려지게 하십시오.(우리를 죽이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이 언약을 꼭 지키마. 혹시 내가 언약을 어기면 나를 죽여라.”라고 했다는 것은 너무 불경스러운 발상입니다.

결국 이때 피를 뿌린 것은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죄 값을 치른 것으로 인정한다는 얘기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같은 맥락입니다.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피가 뿌려진 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모세가 단에 피를 뿌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저희들의 죄로 인하여 이미 다 죽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수긍하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내가 그 피를 너희 피로 인정하마’라는 뜻입니다.


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사람은 맨눈으로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양에게 있는 공격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 태양 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얘기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무서운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보려면 별도의 장비(선글라스)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뵈려면 죄 문제를 해결한 다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적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일이 시내산에서도 있었습니다.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께서 장로 칠십 인은 산 중턱에 머무르게 하고 모세 한 사람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만 ‘특별 대접’을 하는 것은 모세가 그만큼 귀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세가 맡은 일이 귀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에게 계명과 성막 설계도를 주실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만 따로 부르셨습니다.

제가 목사다 보니 저를 가리켜서 ‘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 얘기는 맞는 얘기일 수도 있고, 틀린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다. 목사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는 뜻으로 ‘귀한 사람’이라고 하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별 수 없지만 목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신앙 책임을 전가하기 위하여 ‘목사는 귀한 사람이다’라고 하면 틀린 말입니다.
목사와 교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맡은 역할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책임’은 동등합니다.

강단에 강대상이 두 개 있는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강단을 기준으로 우측에 있는 것이 좌측에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크게 마련입니다.
우측에 있는 것은 설교자가 쓰는 강대상이고 좌측에 있는 것은 예배 인도자가 쓰는 강대상입니다.

교육전도사로서의 사역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임 인사를 겸하여 찬양예배 때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예배를 인도를 보시고 제가 설교를 했는데 굉장히 어색했습니다.
머리가 허연 담임목사님은 조그만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아직 신학생인 제가 큼지막한 강대상에서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님이 큰 단에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제가 작은 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우에 어긋납니다.
제가 담임목사님보다 큰 단에 선 것은 제가 맡은 하나님 말씀 때문이지, 제 자신의 권위 때문이 아닙니다.
누가 선포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일을 맡았습니다.
모세가 귀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가 맡은 일이 귀한 일입니다.


24:17-18>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는 하나님이 맹렬한 불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구름 속에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산밑에 머물러 있고 모세 혼자 산 위에서 하나님을 뵈었는데, 멀리서 보는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서 뵙는 하나님이 서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는 맹렬한 불 같은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항상 맹렬한 불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분은 아닙니다.
이때 모세가 사십 일 동안 하나님과 영광의 구름 속에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성경에는 그 내용이 없지만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눈 것은 분명합니다.
그곳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하늘 영광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벌만 안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서 영원한 기업을 누려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의 중심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만 맴도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건 좋지만 너무 빠지면 곤란하다’는 황당한 얘기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좋지만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갈 만큼 잘하면 곤란하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지만 은행에서 줄을 설 만큼 버는 것은 곤란하다’라는 얘기는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교회 다니는 건 좋지만 너무 빠지면 곤란하다’는 얘기는 말이 되는 줄 압니다.
누군가한테 교묘하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 형벌만 면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국 문턱에 턱걸이하여 가까스로 구원만 얻으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중심으로 초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