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6장
출애굽기 26장
26장에는 모두 세 가?내용이 나옵니다.
성소 덮개(1-14절)와 널판(15-30절), 휘장(31-37절)입니다.
성소 덮개는 네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7절에는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1절에 나온 앙장을 덮는 것입니다.
14절에는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어 앞에 있는 염소 털로 된 덮개를 덮고, 그 위에 다시 해달 가죽으로 된 덮개를 덮는 것입니다.
성소 바깥에서부터 살펴보면 가장 바깥쪽에는 해달 가죽이 있게 되고 그 안에는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 그 안에는 염소 털로 된 덮개, 가장 안쪽에는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든 알록달록한 앙장이 있게 됩니다.
제일 바깥에 있는 것이 해달 가죽입니다.
성소를 밖에서 보면 해달 가죽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소 안에만 들어가면 사방 벽이 다 금이고, 그 안에 있는 기구들이 전부 다 금입니다만 안에 들어왔을 때의 얘기입니다.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비바람에 찌들고 모래 바람에 꼬질꼬질하게 때가 절은 해달 가죽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만 교회 밖에서는 그런 것을 알 재간이 없습니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수두룩하게 있는 건축물일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합니다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교회에 세금을 매기느냐, 마느냐?’를 얘기하고 ‘교회가 들어서면 집 값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합니다.
해달 가죽을 한 꺼풀만 벗기면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 나옵니다.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 주님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해달 가죽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 칸 더 들어와서 예수님의 대속사역을 알아야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었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잎으로 된 치마에 내구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도 도로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짐승 가죽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그 짐승이 어떤 짐승인지 나와있지 않습니다만 양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쨌든 아담 하와의 범죄로 인해서 죄 없는 짐승 한 마리가 죽어야 했습니다.
죄로 인한 대속은 창세기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있어야 사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대속사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을 들추면 그 안에는 염소 털이 있습니다.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염소 털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염소는 양과 대조되어 항상 나쁜 쪽으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16:6-10)
이스라엘은 해마다 속죄일이면 염소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멀리 광야로 쫓아내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염소 역시 소나 양처럼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짐승이니 염소를 번제로 드리는 것은 의아하지 않습니다만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것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멀리 보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때 광야에 간 염소는 들짐승에게 찢게 죽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우리에게서 멀리 격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을 칭의, 성화, 영화로 얘기합니다.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은 칭의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칭의 다음에는 성화가 있습니다.
구원만 얻으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최대한 죄에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냐 하면 죄에 대해서 민감할수록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염소 털입니다.
예전에 ‘구원 확신’을 굉장히 강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질문이 ‘지금 죽어도 천당 갈 자신 있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지금 죽어도 천당 갈 자신이 있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죽어서 천당 갈 자신이 있는지의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따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멀리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흰색)의 네 가지 색깔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든 앙장입니다.
그룹은 천사를 말하는데, 그룹이 수놓아져 있다는 얘기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네 겹으로 된 성소 덮개는 내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없던 상태(해달 가죽)에서 구원을 얻고(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 점점 더 죄를 멀리하며 신앙이 깊어져서(염소 털) 결국 하나님을 직접 뵙기까지 하는 것(네 가지 색깔로 그룹을 수놓은 앙장)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뵙는 날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런 성소 덮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널판입니다(15-30절).
이 널판의 재료는 조각목인데, 폭 한 규빗 반(대략 70cm), 길이 십 규빗(대략 4.5m)의 널판 마흔여덟 개로 성소의 벽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둥과 지붕만 있는 건물은 없습니다.
벽이 있어야 비로소 건물이 됩니다.
성소도 성소 덮개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널판으로 된 벽이 있어야 합니다.
이 얘기를 지금의 교회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도가 있어야 교회가 교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배당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예배당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지,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결국 성소의 벽을 이루는 널판은 바로 우리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15-30절은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17절에 ‘각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하게 하되……’라고 했습니다.
널판을 지지할 수 있도록 요철을 만들라는 얘기입니다.
19절에는 ‘스무 널판 아래 은 받침 마흔을 만들지니 이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지며’라고 했습니다.
마치 기차 레일처럼 은 받침을 두 줄로 만들어서 그 위에 널판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26절에는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지니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라고 했습니다.
성소의 벽을 만드는데 단지 널판을 세운 것으로는 지탱이 안됩니다.
물론 은을 된 받침도 있고 또 촉이 있어서 끼울 수 있게 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길이가 십 규빗(4.5m)이나 되는 널판을 지탱하기에는 힘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띠를 만들어서 그것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조각목에다 금을 입힌 띠로 널판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연합을 볼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22)
바로 이 모습이 성소 널판의 모습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함께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이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를 따집니다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느냐?’ 이전에 모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해서 신앙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이다 보면 그것으로 신앙이 자랍니다.
31-37절에는 휘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휘장은 어떤 것을 가리는 물건입니다.
가장 흔한 예가 연극 공연할 때의 막입니다.
관객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둘러 입장합니다만 공연 시작 시간이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무대가 막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무대 뒤에서는 배우들이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압니다.
이때 막이 가려진 것은 준비가 덜 된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막에 있는 휘장은 그 반대입니다.
준비가 안 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기까지 휘장이 드리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휘장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31-33절)과 성소 출입문 역할을 하는 휘장(36절)입니다.
둘을 유심히 비교하면 하나는 그룹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출26:31)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출26:36)
아담, 하와가 범죄 했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한 사람은 성소 출입문 역할을 하는 휘장을 열고 성소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아무나 열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인간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난로가에 철망을 치는 이유는 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 그룹이 있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입니다.
33절에 보면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휘장이 드리워져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휘장을 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휘장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휘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 적에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27:50-51).
이스라엘이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자 하나님께서 휘장을 여시고 그들을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렸던 휘장이 없어졌으니까 담대하게 언약궤까지 나아가면 됩니다.
죄가 있으면 있을수록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죄가 있으면 안으로 숨으려고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항상 기도를 하고 자던 어떤 사람이 저녁에 회식 자리에서 직장 상사가 권하는 바람에 맥주 한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날은 기도하기가 싫어지는 법입니다.
마치 “야! 이렇게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목욕을 가나? 좀 씻은 다음에 깨끗해지면 가야지.” “이렇게 피가 철철 나는데 어떻게 병원에 가나? 대충 꿰맨 다음에 상처가 아물면 가야지”라고 하는 격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나마 하던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 배로 늘려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더욱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뻔뻔스럽게 나아가야 하고 배짱 좋게 나아가야 합니다.
왜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느냐 하면 본문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는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접속부사입니다.
그러면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그 앞에 설명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만큼 우매하고 어느 만큼 연약한지를 다 아십니다.
괜히 눈치 보며 미적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잘못했으면 빨리 자수해서 광명을 찾아야지, 꼼지락거릴 틈이 없습니다.
골목에서 놀다가 남의 집 유리창 깨뜨렸으면 빨리 집에 와서 돈 달라고 해야 합니다.
어느 세월에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 벌어다가 갚겠습니까?
애가 놀다가 유리창을 깨뜨리면 부모가 물어주는 법입니다.
알밤 한 대는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 때는 ‘우리 애는 참 씩씩하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라는 얘기가 바로 이 얘기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도록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인 우리 주님의 육체가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진 순간부터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